명의 고려와 조선 관계

명의 고려와 조선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년(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한 외교정책을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머리(剃頭辮  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奇皇后)의 오빠인 (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잃어버린 영토의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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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369년 명으로부터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오자 이를 환영하고 성준(成准) 등을 처음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명의 성절(聖節:생일)을 축하하였고,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다시 폐지하였다. 1370년, 고려는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원의 (東寧府)를 치게 하여 원과 절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이 (北元:1368년 이후 원을 북원이라 함)에서도 꾸준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계속하였고,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 정권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親元)정책으로 급변했다. 이 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은 고려의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되고,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등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가는 명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 고려는 명 ·북원에 등거리 외교로 대처하다가 1385년에 이르러 명나라의 사신이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通聘)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으며, 87년에는 원복(元服)을 폐지하고 명제(明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착된 양국관계도 수년 후 고려왕조의 붕괴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高麗權知國事)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 또 국호의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국호와 국왕의 칭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1393년에는 말 9,800필을 보내고 고려 때 명으로부터 받았던 고려국왕의 금인(金印)을 반환하였으나 명은 여진(女眞) 및 세공(歲貢)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국왕의 인신(印信)을 쉽사리 보내 주지 않다가 태종이 즉위한 1400년에 조선국왕의 고명(誥命:왕위승인문서)과 인장을 보내와 대명(對明) 외교관계는 조선왕조 수립 후 8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408년에는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명은 고려 공민왕 이후 처음으로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와 이후 조선은 역대의 국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명에 주청(奏請)하여 ‘책봉(冊封)’이라는 승인을 받았고, 국왕의 사후에는 이를 고하여 시호를 받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또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가의 주요 대사를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등 ‘사대(事大)’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내정 ·외교에 근본적인 제약이 없고 자주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주권국으로서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종주 ·종속관계도 아니고, 명은 명목상 종주적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에의 세공문제(歲貢問題)는 처음에 금 150냥, 은 700냥의 과중한 부담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다른 토산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다가 29년( 11) 이를 면제하고 우(牛) ·마(馬) ·포(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후부터 조선과 명은 경제 ·문화의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그 후 200년간 별다른 변동 없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외교에 있어서도 명나라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사절(使節)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원단(元旦)에 보내는 (正朝使), 황제부부의 탄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와 (千秋使), 동지에 보내는 (冬至使) 등 정례적으로 연 4차 사행(使行)을 보냈다.

이 밖에 (謝恩使) ·주청사(奏請使) ·진하사(進賀使) ·진위사(陳慰使) ·변무사(辨誣使) 등을 수시로 보냈는데, 사행일행은 40여 명이 공인된 인원이었다. 이 사행에 따르는 조공은 일종의 (公貿易)으로 예물과 답례물 형식으로 물물 교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행일행이 가지고 간 물화에 의해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는데, 북경에서는 조선사신이 머무는 (會同館)이, 서울에서는 명사가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이 사무역의 중심지였다.

명에서 제정한 명률(明律)은 조선 초에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이름으로 번역[吏讀文]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經國大典)》의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을 운용하는 데 그 해당조문이 없을 때는 456개조로 되어 있는 《대명률》의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 법률운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국초부터 특히 해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을 구입하고 이를 재간행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명의 견포(絹布) 등 고급물품을 들여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국내의 생산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명 관계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이 3차의 원군(援軍)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명은 이 무렵 말기적 증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대하였고, 이 틈에 만주의 청세력은 더욱 팽대해져 조선은 정묘호란· 등 국난을 겪게 되고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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