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복사

연복사

[ 演福寺 ]

요약 개성시 한천동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사찰.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또는 보제사(普濟寺)라고도 하였다.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37년(정종 3)에 정종이 이 절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절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이 절의 정전(正殿)인 나한보전(羅漢寶殿)은 왕실보다 더 웅장하였다 하며, 그 안에는 석가모니불·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불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500구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나한전의 서쪽에는 높이 200척(약 60m)이 넘는 5층목탑이 있었고 뒤에는 법당을 배치하였다. 특히 연복사가 주목을 받는 것은 정전인 금당(金堂)과 탑은 직선 위에 건립하는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동쪽에 금당(나한보전)을, 서쪽에 탑을 나란히 배치하는 동전서탑(東殿西塔)의 가람배치를 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법륭사(法隆寺)·법기사(法起寺)·법한사(法翰寺) 등 일본 사찰의 예를 들어 이러한 형태는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라고 주장하여왔다.

이 절에는 특히 ·공양왕이 관심을 기울여 문수회(文殊會)·담선회(談禪會) 등을 참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거둥하였다. 1391년에는 공양왕의 명으로 절의 중창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공사비가 엄청나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소로 (丹靑) 공사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태조는 단청공사를 마치게 하고 탑의 위층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으며, 중간에는 대장경을 수장하게 하였다. 절은 과 을 거치는 동안 폐허가 되었다.

이 절의 유물로는 1346년(충목왕 2) 원나라의 공장(工匠)에 의해 조성된 연복사종과 1394년 (權近)이 지은 중창비이다. 이 가운데 중창비의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네 마리의 용이 쌍으로 어우러져서 뒷발로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한편 연복사종은 용·봉황·거북 등이 파도를 넘는 웅건한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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