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분

유희분

[ 柳希奮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의 처남으로 그의 일문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이첨 등과 함께 소북(小北)의 유영경 일파를 숙청한 뒤 정권을 장악하였다. 임해군·영창대군 등을 죽이는 데 가담하였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하는 등 횡포를 자행했다.1623년 인조반정 때 참형을 당하였다.
출생-사망 1564 ~ 1623
본관 문화(文化)
형백(亨伯)
화남(華南)
활동분야 정치

은 문화(文化), 는 형백(亨伯), 는 화남(華南)이다. 아버지는 의 장인인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鄭惟吉)의 딸이다. (南行)으로 관직에 올랐다.

1592년( 25) 때 (翊贊)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 되었다. 1599년 수찬으로 있을 때 류성룡(柳成龍)을 탄핵했다가 민몽룡(閔夢龍)이 그 부당함을 들어 그를 문책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파직당하였다. 1601년 문학에 등용되었고, 1602년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좌랑·사서 등을 거쳐 1603년 정(司饔院正)이 되고 다음해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사성,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그의 일문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예조참판이 된 유희분은 (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를 탄핵하여 숙청한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에 가담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대사간·도승지와 이조··의 참판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臨海君)·(永昌大君) 등을 무고하여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1612년(광해군 4) 시인 (權韠)을 무고하여 유배당하게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이이첨·박승종(朴承宗) 등과 (仁穆大妃)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하여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 해 11월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에 반대하는 관료·서인·유생들을 모두 투옥하거나 유배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붙잡혀 참형을 당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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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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