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문학

10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문학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된 후부터 1921년까지의 혼란시대를 전시(戰時)공산주의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혁명 후 구시대 작가들 중 많은 사람이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그래도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그대로 남아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러시아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불로크와 구밀료프를 들 수 있다. 불로크의 서사시 《십이(十二)》(1918)는 이 시대에 최고 걸작으로 꼽혔고 구밀료프의 문학은 이때 예술적 극치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제정파(帝政派)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 마린엔코프, 에세닌을 중심으로 한 의상파(意象派)와 마야콥스키, 흘레브니코프, 파스테르나크 등을 중심으로 한 미래파도 계속 활약하였다.

한편 ‘프롤레쿨리트’라는 프롤레타리아 문화협회가 문화의 사회주의적 조직화를 위해 활동을 계속하였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작가 단체인 ‘쿠즈니차’가 결성된 것도 이때였다.

1921년 볼셰비키 정권은 국내전쟁의 종말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기업(私企業)의 허용을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혁명 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소련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소련문단에는 자기 나름의 주의와 시점(視點)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상이한 문학단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소련 문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세라피온 형제의 ‘동반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반작가 그룹에는 자먀틴, 바벨리, 필리냐크, 레오노프, 페딘, 조시첸코, 예렌부르크 등 유능한 작가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이 자유로운 개성의 창조에 있었던 만큼 그들의 작품 기조는 혁명의 여파와 국내전의 비극 속에서의 개인의 운명이었다. 바벨리는 《기병대》에서, 필리냐크는 《벌거벗은 해》에서 국내전을 소재로 다루었고, 올레샤는 《선망(羨望)》에서, 레오노프는 《도둑》에서 개인의 권리와 저항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 소설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22년에는 동반자 그룹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새로운 단체 ‘오크탸브리’가 출현하여 마라시킨, 베즈이묜스키, 리베진스키 등 동인들이 동인지 《초소(哨所)에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확립을 위해 활약하였다. 이 무렵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소설로는 푸르마노프의 《차파에프》, 세라피모비치의 《철(鐵)의 흐름》, 페진의 《도시와 해》, 글라트코프의 《시멘트》 등인데 이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방향을 결정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이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는 농민시인 에세닌과 혁명시인 V.마야콥스키를 빼놓을 수 없다.

1928년 제1차 5개년계획이 실시되면서부터 소련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새로운 공장과 운하의 건설, 농업의 집단화와 관련하여 소련문학은 프롤레타리아 일색으로 변형되었다. 국가의 공업화, 농촌의 사회주의적 개조, 노동과 소유에 대한 새로운 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암흑상 등이 작품의 새로운 주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1928∼40), 톨스토이의 《고뇌(苦惱) 속을 가다》(1920∼40)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문학이 점차 대중성을 띠게 되고, 사회주의 건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자 당(黨)은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군소 문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34년에 ‘소련작가동맹’이라는 단일기구를 형성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련문학의 공식적인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숙청의 공포 아래에서 문학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노골적으로 가해졌고 따라서 창작활동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문학은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고 조국 방위를 기조로 삼은 시모노프, 바실렙스카야, 트바르돕스키 등 신인 작가들이 진출하게 되었다. 41년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예술의 모든 분야가 총력전에 동원되었다. 개전 후 소련문단의 중진 톨스토이는 “예술가는 단결하여 국난을 막자”고 호소함으로써 많은 작가들이 솔선해서 전쟁터로 향했다. 숄로호프도 전쟁물을 썼고 망명지에서 돌아온 예렌부르크도 많은 논문과 수필에서 나치즘을 공격하였으며 장편소설 《파리 함락》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밖에 바실렙스카야의 《무지개》, 고르바토프의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 시모노프의 《낮과 밤》 등은 이 무렵에 나온 대표적인 전쟁소설이다. 시 분야에서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사코프스키의 서정시를 비롯하여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트바르돕스키의 《바실리툐르킨》 등이 있다.

러시아 문학은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더불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개인숭배의 배격을 공공연히 논란하였다. 공포의 상징이던 베리아가 숙청되는가 하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던 죄수들이 돌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복권되었다. 바야흐로 공포의 시대는 지나가고 소련 전체가 새로운 자유로 충만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에서도 민감한 반응을 일으켜 혁명 후 처음으로 ‘자유의 한계성’을 둘러싼 논쟁까지 벌어졌는데 바로 이때 예렌부르크의 《해빙(解氷)》이 발표되었다. 《해빙》은 이른바 해빙기 문학의 효시가 되었고 소련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B.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와 두진체프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등이었다. 《의사 지바고》는 정치적 이유로 소련 내에서의 출판이 금지되었는데, 이 작품이 외국에서 출판되자, 58년 스웨덴 한림원(翰林院)에서는 이 작품을 노벨상 수상작품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는 강요된 여론에 의해 수상을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소련 문단은 해빙과 결빙이 엇갈리는 불연속선상에서 정치와 문학의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특히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악쇼노프, 카자코프, 그라지린 등의 청년작가들은 새로운 테마, 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켜 새 세대의 문학을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그 밖에 예브투센코, 보즈네센스키, 아호마둘리나 등 시인들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서 러시아 문학의 가장 큰 수확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솔제니친의 탄생일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63년에 한 청년장교의 숙청 책임을 추구한 단편 《크레체토프역(驛)에서 생긴 일》을 발표하여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고, 《암병동》 등이 외국에서 발표됨으로써 반소작가라는 낙인이 찍히는 동시에 소련 작가동맹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스웨덴 한림원은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훌륭하게 추구해 온 윤리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강제노동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의 국외출판으로 74년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94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