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동서교섭

근세의 동서교섭

몽골제국이 단명하여 마르코 폴로가 귀국할 때는 이미 육로가 두절되어 해상통로를 이용하였다. 중국에서 원(元)나라가 무너지고 명(明)나라가 등장하자 남해로 향한 진출은 역사상 최대규모로 시도되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부터 시작된 (鄭和)의 해상 원정대는 전후 7회에 걸쳐 자바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에서부터 멀리 아프리카 동안의 까지 진출하였다.

1488년에 바르톨르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발견, 이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유럽과 인도와의 상업적인 첫 항로를 개척하였다. 따라서 몽골제국 붕괴에 따른 동서교통의 두절이 해상통로를 통해 연결되었다.

16세기 이후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그리스도교와 서양학술을 전하였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독일인 아담 샬이 제조한 대포로 청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는데, 18세기 이후의 동서교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지금까지 오랫동안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러시아가 동진을 계속하여 청과 북쪽의 국경을 접하게 되어 1689년에는 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고, 청나라는 계속해서 영국 ·네덜란드 등과 조약을 맺었다.

그 후 중국인은 차차 밀려오는 서양의 세력과 필사적인 투쟁을 하고, 1842년의 아편전쟁 후로는 중국 이외의 모든 문화를 멸시하던 ‘(中華思想)’의 자존심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그들은 서양에 중국을 능가하는 무력 이외에도 제도 ·도덕 ·학문 ·예술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영국과의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중국은 처음으로 외국, 즉 오랑캐의 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고, 항구를 개방해야만 되었다.

1850년에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은 그 자체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보다는 그리스도교라는 외래사상이 그 지도이념이 되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청나라의 멸망은 중국 역사상 왕조의 교체라는 의미 이상으로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전통의 대시련이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청나라 말기 이후 동서교섭사는 고대나 중세에 볼 수 없었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에서 온 압력이라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제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별이나 동서의 구분도 점점 희박해져 세계 일체시대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동서교섭사의 현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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