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결과와 의의

갑신정변의 결과와 의의

김옥균 선생 유허지

김옥균 선생 유허지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10월 20일 일본 공사관이 대중들에게 공격받고 불에 타기 시작하자 김옥균 등 9명과 일본군은 조선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10월 21일 새벽에 인천의 일본 영사관에 도착하였고, 10월 23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조선에 남은 급진개화파와 그들의 가족은 대역죄로 처벌되었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신분제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가 약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점, 청군의 개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점, 개혁 지지기반이 취약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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