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남종화

한국의 남종화

명·청대(明淸代) 중국남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남화나 남종문인화론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후기의 (肅宗)·(英祖) 연간이다. 종래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러한 화관(畵觀)은 보다 일찍 전하여졌을 법하지만, 조선 중기의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전란으로 인하여 문화활동이 침체되었고, 불유쾌한 대청관계(對淸關係) 및 대명숭상(對明崇尙)의 잔존으로 인하여 청나라로부터의 새로운 화관의 수용이 더욱 늦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풍은 조선과 청나라 관계가 점차 안정된 숙종 후반기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영· 이후에 와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남종화는 [北京]을 다녀온 사행원(使行員)과 화원들에 의하여 전래된 진작(眞作)이나 방작(倣作)을 통해 파급되었지만, 《(芥子園畵傳)》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등을 비롯한 명·청대의 화보(畵譜) 등도 남종화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남종화는 조선왕조 화실에 18세기 초엽부터는 본격적으로 침투하여 선비화가들은 물론 화원들도 보편적으로 이를 따랐다. 이 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남종문인화가로는 (李麟祥:1710∼1760)·(姜世晃:1712∼1791), (申緯) 등이다. 물론, 이에 앞서서 후기화단의 선두로서 탁월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남긴 (鄭敾)도 남종화에 좋은 소폭작품을 남겼고, 그의 제자인 (沈師正)도 중국남화에 육박할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하나의 풍조나 격식으로서의 남종문인화는 영·정조 시대에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인상의 고아간담(古雅簡淡)하며 문기(文氣) 넘치는 화면이나, 강세황의 단아한 필법에 의한 중국남화의 대가들에 대한 다양한 방작(傲作) 등을 통해 당시 예단(藝壇)의 남화수용에 대한 열의를 알 수 있다.

강세황의 뒤를 이어 신위는 청조문인들과의 직접적 교유를 통하여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기량을 묵죽(墨竹)에 쏟았다. 윤제홍(尹濟弘)의 간략한 구성과 수채화같이 맑은 분위기를 창출한 이 화풍은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남종화풍의 폭넓은 유행은 문인화가뿐만 아니라 화원들의 그림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김유성(金有聲)이나 이재관(李在寬)은 소재선정이나 처리면에서 남종화법을 그 나름대로 수용하여 정형화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장기(匠氣)가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종화풍의 진정한 유행과 토착화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 일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유불(儒佛)의 동양적 사고를 배후에 두고 시서화본일률(詩書畵本一律)이라는 문인화의 세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김정희의 작품은 중국 문인화의 세계와 상접(相接)한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김정희의 비호 아래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 여러 화가가 배출되고, 묵란(墨蘭)의 대가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 괴석(怪石)의 작가 정학교(丁鶴喬) 등이 여기에 가담하여 조선 후기의 심원한 문인화풍이 진작되었다.

한편, 남종화가 조선 후기의 화단을 지배하게 되고 사회적 수요는 역시 사대부계층에 있었으므로, 이에 부응하여 화원들도 거의 남종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남종화단의 흉중구학(胸中丘壑), 즉 마음 가운데 자리잡은 산수를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철리(哲理)나 유교적 교양이 정리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화원에게서는 남화라 해도 형식주의의 도말(塗抹)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 남화가의 수도 많았지만 작품상의 가치면에서 쇠운(衰運)을 면치 못한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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