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화와 문인화

남종화와 문인화

문인화란 화업(畵業)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사대부계급에 속한 자가 여기(餘技)로 그리는 그림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후한(後漢) 말 2세기 (張衡)·(蔡邕) 때에 문인화가 그려졌다는 말이 된다. 그 후 육조(六朝)·당송대(唐宋代) 북송(北宋)에서 (蘇東披)나 (文同)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문인화 집단이 형성되고, 문인화란 외형적 닮음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뜻을 그려내야 한다는 문인화론의 대체적 윤곽이 제시되었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문인화는 이렇다 할 정해진 양식이 없었는데, 원말 4대가에 이르면서 대체로 하나의 양식적 면모를 갖추었다. 부드럽고 온유한 필법을 몇 번이고 중첩하여 그렸으며, 색채도 담묵화(淡墨畵)가 주로 쓰였다.

문인화가 이처럼 양식적 개념으로 변모하였을 때 그들이 택한 양식이 바로 남화의 양식과 맥(脈)을 같이 한다. 명나라 때 중반의 · 등 오파가 활약하던 15세기에 남화는 문인의 적극 참여로 점점 융성하였다. 17세기에는 많은 남화가(南畵家)가 배출되면서 남화는 전통을 지닌 하나의 양식으로 화단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회화적 상황하에서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이 제시되었다. 그 당시 동기창은 문인화의 계보도 만들었는데, 문인화의 비조 역시 이고 그 뒤 (李成)·(范寬) 등을 거쳐 이용면(李龍眠)·미가 부자로 이어져 원말 4대가와 심주·문징명으로 계승된다. 문인화 계보는 남화의 계보와 일치되며, 이 때부터 남화와 문인화의 혼동이 시작되었다.

그후 남화의 세력이 강화되어 문인 신분이 아닌 전문화가까지 남화를 그렸다. 청대(淸代)에 들어서면서 남화는 더욱 성해지고, (四王吳惲)이라고 하는 (王時敏)·(王鑑)·(王翬) ·(王原祁)·(吳歷) 및 운수평(惲壽平) 등이 남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체로 틀에 박히고 형식화된 기미가 강하였고, 청나라 때의 에게까지도 원용되어 남화를 그리게 되었다.

회화사상 청조남화(淸朝南畵)에서 주목할 것은 이런 정통파 화가들보다도 오히려 석도(石濤)·팔대산인(八大山人)을 필두로 한 개성파(個性派)들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명나라의 유민으로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감과 내적 감정을 작화(作畵)의 밑바닥에 깐 화가들이었다. 궁정화가들마저 남화 일로로 치닫던 18세기 말, 상업의 중심지였던 양저우[揚州]를 중심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개성표현을 구가하였던 화가 일파가 나타났다.

(金農)·(鄭燮)·이선(李鮮)·(黃愼)·(羅聘) 등 8인의 화가로서 이들을 [揚州八怪]라고 한다. 이들은 중국 남화의 최후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청나라 중기 이후 남화가의 수는 급증하였지만, 세속에 영합한 직업화가에게까지 널리 파급되었으며, 습기(習氣)에 흐르는 경향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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