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과거

고려시대의 과거

의 과거제도는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의 건의로 958년( 9) 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창설하였고, (成宗) 때 합격자를 우대하였다. 초기의 과거시험은 제술과(製述科:進士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醫卜科)를 두었으며, 1136년( 14)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문관 등용시험이었으나, 제술과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제술과의 합격자 수가 6,000여 명이나 되는데 비해 명경과 합격자는 450명 정도인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 점은 당시의 귀족들이 (經學)보다 문학을 숭상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잡과는 위의 양과 보다 그 격이 낮았다.

이 밖의 과거에는 승과(僧科:敎宗試와 禪宗試)가 있었으며, 무신(武臣)의 등용을 위한 무과(武科)는 1390년( 2)에 실시하였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여 거의 없었다. 과거의 응시자격은 (良人)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민이나 승려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양인 이상은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농민은 사실상 응시하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과거 본문 이미지 1승과잡과음서명경과교종선선종선

응시 절차는 3차에 걸쳐 시험을 보게 하였다. 처음에는 매년 과거를 실시했으나 성종 때에는 3년[式年試]에 한번씩 실시하였고, 현종 때에는 격년으로, 그 후에는 매년 또는 격년으로 실시하였다. 1차시험에서는 중앙(개경)에서 선발한 자를 상공(上貢), 지방에서 선발한 자를 향공(鄕貢), 외국인 중에서 선발한 자를 빈공(賓貢)이라고 하였다. 2차시험은 1차시험에 합격한 삼공(三貢:상공·향공·빈공)들을 (國子監)에서 다시 선발(국자감시:재시), 이에 합격한 자[貢士]와 국자감에서 3년 이상 수학한 학생, 벼슬에 올라 300일 이상 경과한 자들이 최종시험인 3차시험[東堂監試]을 보게 하였다.

합격자는 제술과는 갑(甲) ·을(乙)의 2과로, 명경과는 갑·을·병·정의 4과로 나누었다. 합격자에 정원은 없었으나 중기 이후 대체로 33명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는 예부에서 관장하였고,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종 시험에서 1등을 장원(壯元), 2등을 아원(亞元: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고 하였고, 빈공에서 합격한 자를 별두(別頭)라고 하였다.

때로는 동당감시에 합격한 사람도 임금이 다시 시(詩)·부(賦)·논(論)으로 친히 시험을 보게 하여 등급을 정하는 복시(覆試:簾前重試 ·親試)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복시는 성종 때 처음 시작하였으나 상례적인 제도는 아니었다. 최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홍패(紅牌)를 주었는데, 이것이 곧 합격증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제도는 지공거와 합격자가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어 일생을 통하여 그 예(禮)가 부자간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학벌이 형성되어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의종 이후 과거제도는 문란하여져 69년 때 (李穡)은 지공거 (李仁復)과 논의하여 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향시(鄕試)·감시(監試:會試)·전시(殿試)의 3단계의 제도를 확정하고, 시험관인 지공거도 시험 1일 전에 임명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과거 이외에 5품 이상인 관리의 자제에게는 1명에 한하여 정치적 특혜를 인정하여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에 채용한 음서제도(蔭敍制度)가 있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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