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의 역사

나이지리아의 역사

나이지리아의 나이저강(江) 에는 유역에 필적할 고대문화가 꽃피웠다는 설이 있다. 남부의 에서 출토된 (靑銅)이나 (Ife)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등은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이른바 노크(Nok)문화라고 하는 문화의 유산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나이지리아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북부에는 13세기에 이미 가 들어와 주민들 사이에 침투되어 있었고, 북부의 도시 의 성벽은 11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그들 북부의 주민과 부족신앙을 지켜온 남부 주민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15세기에 들어온 인은 남부에서 가장 세력을 떨친 베냉 왕국(王國)과 노예매매의 외교관계를 열었으나, 북부에는 카누리족의 카넴보르누 왕국과 하우사족의 작은 나라 14개국이 있었다. 1802년에 풀라니족의 이슬람 지도자 우스만 단 포디오가 하우사족의 제국을 정복하여 풀라니 왕국을 세웠고, 남부에는 요르바 왕국·베냉 왕국 등이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포르투갈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매매에는 유럽 여러 나라가 가담하고, 17세기에는 도 끼여들었다. 그러나 1807년 영국은 노예매매를 불법화하고 야자기름의 합법적 무역 거래에 주력하였다.

1827년에 영국은 페르난도포섬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1849년에는 그곳에 영사관을 두어, 나이저강 를 세력권하에 넣었다. 다시 1851년에는 노예무역 기지 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1861년 직할식민지로 하였다. 1854년경부터 유럽의 여러 회사가 나이저강을 분할하여 무역을 시작하였다. 1879년, 조지 골디는 그곳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영국계 회사를 모두 합병하고, 다시 몇 해 후 라이벌인 프랑스계 회사를 매수(買收)하는 한편, 나이저·베누에강 유역에 사는 여러 부족의 장(長) 및 에 를 둔 풀라니왕 등과의 사이에 통상협약을 맺었다. 이 결과 1885년 베를린회의에서 나이저강 유역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되었다.

1886년에 조지 골디가 설립한 회사는 영국 국왕으로부터 특허장(特許狀)을 받게되어 ‘왕립(王立)나이저회사’라고 불리웠다. 행정권·사법권을 가진 ‘왕립나이저회사’는 1897년에 최후까지 회사의 지배에 항거해 온 풀라니 왕국을 무력으로 눌러 회사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후 영국 국왕은 ‘왕립나이저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하고, 1900년 1월부터 영국 정부가 그 영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나이저강 삼각주와 하류 유역은 그 때까지의 보호령과 합쳐 ‘남부나이지리아보호령’이라 명명하고, 1906년 라고스 식민지까지 합병하여, 라고스를 수도로 삼았다. ‘왕립나이저회사’의 북방영토는 ‘북부나이지리아보호령’이 되어 프레드릭 러가드가 초대 판무관(辦務官)이 되었다. 1914년 남부와 북부는 통합되어 영국의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이 되었다.

중 영국은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령 을 분할 점령하고, 1922년 그 점령지를 의 위임통치령으로 하여 나이지리아와 함께 통치하였다. 그 무렵 남부에서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났으나, 그것은 ·요루바족 등의 부족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후 다시 남부에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나 북부에 파급되었다. 1947년과 1951년의 제정을 거쳐 1954년의 3차 헌법에서 연방제가 확립되고, 1960년 10월 영연방(英聯邦)의 일원으로 독립하였다. 1961년 주민투표에 의해 북부 카메룬을 병합하고, 1963년 10월 북부·동부·서부·중서부의 4개주(州)로 나뉜 연방공화국을 선언하였다.

독립한 나이지리아에서는 인구가 많은 북부주가 연방의회의 다수파가 되어 중앙정부를 지배하였고, 그것이 동부주·서부주 주민의 심한 불만을 조성하여 정정(政情)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1966년 군사가 발발, 연방 총리 발레와 등 많은 정치가·군인이 죽고, 이보족 출신의 장군(將軍) 이론시가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도가 많은 남동부의 이보족은 북부의 이슬람교도와 대립관계에 있다. 1966년 5월 이론시 군사정권이 연방제 폐지·중앙집권제 채택을 꾀하자 북부주 등에서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7월 이론시가 암살되고, 북부의 소부족(小部族) 출신인 중령(中領) 고원이 군사정권 수반이 되어 연방제 부활 및 주(州)의 분할 재편성을 포함하는 신헌법안(新憲法案)을 제안하였다.

신헌법안에 반대한 동부주의 군정장관 중령 오주쿠는 연방으로부터의 동부주 이탈을 주장하였다. 가나 정부의 중재로 고원 군사정권과 오주쿠 동부주 정부는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고원 군사정권이 종래의 4개주·1연방수도(聯邦首都)를 폐지하고, 12주로 세분하는 방침을 결정한 1967년 5월 오주쿠는 종래의 동부주를 나이지리아에서 분리하여 ‘비아프라공화국’으로 독립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오주쿠는 이보족(族)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도 외에, 동부주에서 산출되는 석유의 이권료(利權料) 등을 독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비아프라 분쇄를 결정하고, 7월 7일 전쟁을 개시하였다. 1970년 1월까지 2년 반에 걸친 (內戰)에서 이보족은 전사자와 아사자(餓死者)를 합쳐 25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오주쿠가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전면 항복을 하였다.

고원 군사정권은 정치단체를 불법화한 상태에서 내전 후의 황폐 복구, 옛 비아프라 지역주민의 처우 문제 등에 주력하면서 민정복귀(民政復歸)를 연기해 오다가 1975년 7월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실각되고, 다시 1976년 2월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장군 오바산조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8월 민정 이양을 거쳐 국민당의 샤가리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3년 12월 장군 부하리가 쿠데타를 감행,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시 1985년 8월 소장 바방기다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1993년 6월 대선이 실시되었으나 선거부정을 이유로 무효화하고 1993년 8월 대통령 바방기다가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하였다. 정권을 이양받은 어네스트 쇼네칸 과도정부의 쇼네칸(Shonekan)은 1993년 11월 국방장관 아바차 주도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사임하였고, 이에 따라 아바차의 군사 정부가 다시 등장하였다. 1998년 6월 아바차가 사망하자 새로 대통령이 된 아부바카르는 8월에 민정 이양을 발표하였으며 12월의 지방정부 선거에 따라 3개 정당이 정식 등록하였다. 1999년 2월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가 제4공화국의 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2003년 4월 재선되어 2007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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