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만인소

영남만인소

[ 嶺南萬人疏 ]

요약 1881년 영남지방의 유생 1만여 명이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낸 상소.

1881년(고종 18) 3월 25일(음력 2월 26일)에 경상도 예안(禮安)의 인 (李晩孫)ㆍ(姜晉奎)ㆍ황재현(黃載顯) 등 1만여 명의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연명을 해서 올린 집단 상소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인소(萬人疏)는 1만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대규모 집단상소를 가리킨다. 1792년(정조 16)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伸寃)을 위해 영남지방의 유생 1만여 명이 상소를 올린 것을 필두로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집단행동의 한 방법으로 여러 차례 만인소가 행해졌다. 영남 지방에서도 1792년만이 아니라, 1855년(철종 6)과 1868년(고종 5), 1875년(고종 12), 1884년(고종 21)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만인소가 행해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881년(고종 18)에 개화정책에 반대해 이루어진 것을 '영남만인소'라고 부른다.

1880년 제2차 (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金弘集)이 청나라의 주일 참찬관이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朝鮮策略)》을 왕에게 바쳤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친청(親淸)ㆍ결일(結日)ㆍ연미(聯美)의 외교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영남의 유생들은 1881년 2월에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앞세워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집단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그해 4월에 만인소를 주도한 이만손 등을 붙잡아 국문을 하였으며, 6월에 이만손과 홍시중(洪時中)을 강진현 신지도에, 강진규를 흥양현 녹도에, 황재현(黃載顯)을 진도부 금갑도로 유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유배된 뒤에도 그해 말까지 홍재학(洪在鶴) 등 강원도 유생들과 신섭(申imagefont) 등의 경기도 유생들, 백낙관(白樂寬) 등의 충청도 유생들의 척사 상소가 계속 이어졌다. 이처럼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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