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여학교

정신여학교

[ 貞信女學校 ]

요약 엘레스가 정동(貞洞) 제중원 사택에 설립했던 사립여학교.
개교일 1887년 6월
구분 사립
설립자 엘레스(Ellers, A.J.)
소재지 서울 송파구 잠실동(현재)

1887년 6월, 미국 북장로교의 여의사이자 선교사인 엘레스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정동(貞洞)의 제중원 사택에 정동여학당(貞洞女學堂)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사립여학교이다. 처음에는 5세의 여아 1명으로 시작하였고 초대 학당장은 엘레스, 성경과 산술 두 과목만을 가르쳤다. 첫 5년 동안에 52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생활관습과 예절은 한국식을 존중하여 하루에도 10여 차례의 꿇어 앉는 평절을 시켰다고 한다. 1895년 연지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립연동학교(私立蓮洞學校)로 교명을 바꾸었는데, 이때의 총학생수가 10명, 10월 20일에 첫수업을 시작하여 이 날이 개교기념일이 되었다.

당시의 교과목으로는 성경·한문·역사·지리·산술·도화·습자·체조·가사·침공·위생 등을 가르쳤고, 수업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소학교 과정을 마치면 여학교 과정으로 올라 졸업해 나갔다. 학교 옆의 연동교회에서 매일 예배를 보았는데, 일요일의 합동예배 때에는 전교생이 를 쓰고 구리개교회(명동 소재)까지 떼지어 걸어가는 모양이 장안의 화제였었다.

1907년에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하였고, 1909년 정신여자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12년에 사범과와 보수과를 병설하였다가 1915년에 폐지하였다. 1911년, 학제변경으로 여자중등교육기관이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으나 일제 학무국은 정신여자중학교를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지정하여 주지 않고 탄압하였는데, 동창들이 운동을 벌여, 1928년에 선교부의 지정학교로 지정받았다.

당시 지하조직을 통해 3·1운동에 동참했던‘대한민국애국부인회’회장에 4회졸업생인 김마리아가 선출되어 그 본부를 정신여학교에 두었던 관계로 이 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극심했다. 또 1919년 1월 고종황제 국상 때에는 복상하고 항거하였고, 1926년 6·10만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정신여자중학교에서 30여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1939년 일제의 국어말살정책과 (神社參拜)에 대한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고 학교 설립재단이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며, 친일 한인의 손에 학교의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45년 3월에는 풍문학원(豊文學園)에 합병되어 정신여학교는 실질적으로 폐교되었다. 8·15광복 후 1947년 5월 김필례(金弼禮)가 교장에 취임하면서 복교하였고, ‘교육법’에 따라 1950년 6월 정신여자중학교는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어 두 학교로 개편되었다. 1978년 12월 정신여자고등학교는 송파구 잠실동의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여 교세를 확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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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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