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드뇌

외젠 드뇌

요약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1902년 한국에 들어와 인천 성당에 부임하였다. 인천박문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교장으로 일해 총독부 표창을 받았다. 해성 보육원의 재정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보육원 부속 병원과 답동 성당을 건립하였다.
원어명 Eugéne Deneux
출생-사망 1873.7.26 ~ 1947.12.9
본명 외젠드 드뇌
별칭 세례명 에우제니오, 한국명 전학준(全學俊)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프랑스
주요수상 192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교육관련 공로 표창

1873년 프랑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뇌(한국명 전학준)는 1896년 사제서품을 받고, 1902년 9월 6일 투르니에(한국명 두계창)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교장 기낭(한국명 진보안) 신부를 도와 신학교에서 일하였다. 1903년 전라남도 무안으로 부임하여 목포성당 주임으로 있던 데예(한국명 조유도) 신부를 도와 약 10개월 동안 사목하였다. 1904년 4월 마라발 신부 후임으로 인천성당(현 답동성당) 4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부임 당시 인천성당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 수녀들의 분규에 마라발 신부가 관련되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일로 마라발 신부는 G.C.M.뮈텔 주교로부터 성무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영종도에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육사업을 통한 사목에 주력하는 한편, 영종도에 머루르고 있던 마라발 신부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자주 방문하였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에게 교회 소속의 학교는, 많은 외교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을 입교시키고, 또 많은 한국인과 접촉하여 교리를 가르치는 데 가장 용이하고 적절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교육사업은 전교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1909년 드뇌 신부는 이미 1900년 9월 1일에 설립된 박문학교의 새로운 설립자 겸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하였다. 1917년에는 일제 당국의 지시로 남자부와 여자부를 합쳐서 '인천박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함과 동시에 학교운영을 한국인에게 맡기고 싶었으나 일제의 강요에 의해 설립자 겸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하여 계속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1923년 학교의 운영과 한국인의 교육을 위한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사유지인 인천 용현동과 영종도 등지의 20여 만평의 농토를 해성보육원에 기증하여 보육원 운영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으며, 1935년 해성보육원의 부속병원이 개설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또, 인천성당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1934년 성당 증축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현재의 인천교구 인 답동성당을 완공하였다. 35년 동안 인천성당의 주임신부로, 박문학교의 교장으로, 또 해성보육원 원아들의 어버이로 활약하여 전교뿐 아니라 성당건축, 학교와 병원설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답동성당 낙성식을 계기로 본당 신부직에서 물러나 인천의 수녀원에 거주하면서 수녀들의 지도 신부로서 여생을 바쳤다. 1947년 12월 9일 세상을 떠나 인천시 용현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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