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스토 1세

갈리스토 1세

[ Callistus Ⅰ ]

요약 제16대 교황(재위 217~222). 노예였으나 해방되어 지금도 '갈리스토의 카타콤베'라고 불리는 아피아 가도의 묘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217년 교황이 되어 양태론을 주장하던 사벨리우스를 파문했다. 또한 노예 남자와 자유인 여자와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출생-사망 ? ~ 222
국적/왕조 로마 제국
재위기간 217년 ~ 222년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로마 트라스테베레

순교자, 성인으로 축일은 10월 14일이다. 로마 의 노예 계급 출신으로, 신자인 주인 카르포포루스의 영향을 받아 신자가 되었다. 주인에게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회계를 담당하다가 돈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 고발되었다. 총독은 그에게 매질을 하고, 사르디아섬 광산에서 일하는 중형을 내렸지만, 마침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가진 로마 황제 콤모두스의 아내 마르치아의 호의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석방되고 노예 신분에서도 해방되었다.

197년경에 교황 제피리노는 그를 부제품에 올리고 압피아 가도의 신자 묘지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갈리스토는 충실히 그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교황의 신임도 받아 교황 보좌역으로 등용되었다. 이 묘지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라 갈리스토의 카타콤베라고 불린다.

갈리스토는 217년 제피리노를 승계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황직에 가장 유력시되었던 힙폴리투스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교황으로 즉위한 후, 그는 먼저 양태론(樣態論)을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사벨리우스를 파면하였다. 이에 사벨리우스는 힙폴리투스와 합세하여 “갈리스토는 정통 교황이 아니며 그가 초대 교회 때 엄격했던 행위를 완화시켜 신자들의 생활을 해이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갈리스토는 이런 모든 비방을 묵묵히 인내하고, 신자들 생활의 어려움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현실을 고려하여 노예 남자와 자유인 여자와의 결혼을 새로 허용하였다. 222년에 즉위한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보이며 성당 건축을 허가하고 예수 성상을 정중히 다루도록 명령한 것은 이러한 갈리스토의 인품에 감화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갈리스토는 4세기경부터 순교자로 공경받았는데, 그가 운명할 당시는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당한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폭도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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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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