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1세

빅토르1세

[ VictorⅠ ]

요약 가톨릭 성인, 교황(재위 189~198/199). 최초의 라틴계 교황이었던 그는 그리스와 동방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교회의 공식 언어를 라틴어로 바꾸었으며 부활 축일 논쟁에서는 로마 교회의 관습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황제의 가문과 친분을 맺은 첫번째 교황이기도 하다.
출생-사망 ? ~ 198/199
국적/왕조 아프리카 출신
재위기간 189년 ~ 198년/199년
활동분야 종교

축일은 7월 28일이다. 《교황 연대표 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교황 빅토르 1세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펠릭스는 사제였다고 한다. 최초의 라틴계(고대 로마인) 교황이었던 그는, 당신 안에 팽배해 있던 그리스와 동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로마 교회의 라틴화를 촉진시켰으며, 교회의 공식 용어인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대체시켰다. 교황 빅토르 1세는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날짜에 대해 두 가지 관행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로마교회의 관습이 모든 교회에서 준수되기를 원하였다.

당시 동방교회는 사순 시기 40일을 엄격히 준수하여 니산월 14일이 비록 평일이더라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였던 데 반해, 로마 교회는 니산월 14일 다음 첫 주일에 기념하였다. 이러한 부활 축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빅토르 1세 교황은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에페소의 폴리크라테스가 이끄는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로마교회의 전통을 반대하였다. 이에 교황은 폴리크라테스 주교를 파문하였으나 무리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부활 축일 논쟁은 계속 이어졌으나, 빅토르 1세 교황 때에 이루어진 부활 축일 논쟁은 로마 교회가 다른 총대주교좌에 영향력을 행사한 첫 사례를 보여 준 것이었다.

교황은 또 그리스도 양자설(養子說)을 유포한 비잔틴의 테오도투스를 파문하였으며, 그노시스주의의 저술가인 플로리누스의 사제직을 박탈하였다. 빅토르 1세 교황은 황제의 가문과 친분을 맺은 첫번째 교황이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재위 180∼192) 황제의 애첩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마르치아에게 사르디니아 광산으로 추방당한 신자들의 명단을 주어 그들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중에는 훗날 교황이 된 갈리도스 1세(재위 217∼222)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레네오는 이 시기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의 궁전에서 공직자로 일했다고 하였다. 《교황 연대표》에는 빅토르 1세 교황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무덤 곁에 매장된 마지막 교황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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