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6세

비오 6세

[ Pius Ⅵ ]

요약 교황(재위 1775∼1799). 가톨릭 교회가 매우 위태로웠던 혼란기에 재임했다. 조카들 때문에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프랑스 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교황령을 잃고 로마에서 쫓겨나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 오벨리스크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 오벨리스크

출생-사망 1717.12.25 ~ 1799.8.29
국적/왕조 이탈리아
재위기간 1775년 ~ 1799년
본명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체세나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마르코 아우렐리오와 안나 데레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3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페라라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이곳의 교황 대사인 T.루포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740년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가 선출되면서 루포가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의 교구를 대신 관리하였다.

로마나 나폴리 왕국 사이의 관할권 분쟁을 조정함으로써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753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175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66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의 신임을 얻어 교황청 회계 책임자가 되었고, 1773년 4월 26일에는 으로 서임되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수회의 폐지에 관한 가톨릭 국가들과 교황청 사이의 논쟁에 가담하였으며, 17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사망하자 이듬해 2월 15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가톨릭 교회가 매우 위태로웠던 혼란기를 보내면서 조카들의 중용으로 내적으로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외적으로는 계몽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1789∼1799)에 의해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유배·처형되었으며, 1793년 11월에는 그리스도교가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이에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하였다.

나폴레옹이 을 침공하여 볼로냐·페라라·모데나·로마냐 등의 교황령을 잃었으며, 1798년에는 로마가 점령되고 이 선언되자 교황청은 로마에서 쫓겨났고 남아 있던 다른 교황령마저 잃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에 의해 1799년 3월 28일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로 끌려간 교황은 그곳에서 같은 해 8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1802년 2월에 그의 유해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 ,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