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피에르 폴 비예모

마리 피에르 폴 비예모

요약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1892년 한국에 건너왔다. 전라도 지방에 파견되어 되재 성당을 건축하였다. 1898년 서울교구 재정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20년 가까이 일했고 약현성당, 명동성당 주임 신부를 역임했다.
원어명 Marie Pierre Paul Villemot
출생-사망 1869.6.28 ~ 1950.11.11
별칭 한국명 우일모(禹一模)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종교

비에모(한국명 우일모)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3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로 임명되었으며, 1892년 6월 1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며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濟物浦:현 답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르 비엘(한국명 신삼청) 신부가 요양차 홍콩으로 떠나게 되자 그는 9월 23일 임시 주임으로 부임하여, 약 7개월 동안 이 곳에서 사목하면서 임시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학교 설립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1893년 4월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일명 차돌배기(현 백석)에 정착하였다가 이듬해 초 되재로 거처를 옮기고 즉시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전주(全州)에서 사목하던 보두네(한국명 윤소물) 신부와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복귀하였다. 중단되었던 성당 신축 공사를 재개하여 얼마 후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을 완공하였고, 전교에도 힘써 전라도 북부 산간 지대에까지 순방하였다.

그후 1898년에 서울교구 재정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2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잠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1916년 약현(현 중림동) 성당 주임으로 임명된 후에는 교세 신장과 함께 본당 내의 남녀 가명학교(加明學校) 운영에 역점을 두었으며, 1926년 3월에는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明洞) 성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다가 1942년 고령으로 현직 사목에서 은퇴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재임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7월 1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7월 19일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여러 수용소를 거치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으며, 그해 11월 11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82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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