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집

박순집

[ 朴順集 ]

요약 세례명 베드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여 순교자들의 시신 발굴에 도움을 주었다. 증언한 내용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절두산성지에서 소장 중이다.
출생-사망 1830 ~ 1911.6.27
별칭 세례명 베드로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을 이어받으며 성장하였다. 부친 박 바오로는 성 L.J.M.[池世亨] 주교, P.모방[羅伯多祿] 신부, J.H.샤스탕[鄭牙各伯] 신부 등이 1839년 9월 21일 에서 순교된 몇몇 신자들과 그 시신들을 찾아서 에 안장하였으고, 1843년에는 그 유해를 발굴하여 박씨 집안의 선산인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박해 후 삼성산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1901년 10월 21일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바오로는 성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로 이장되기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내 와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다.

그는 1866년 가 일어난 뒤 제 4대 조선교구장 S.F.베르뇌[張敬一] 주교, S.브르트니에르, 볼리외[徐沒禮], P.도리, (Petimicolas), 푸르티에[申妖案]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군인으로서 직접 목격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의 집안에서는 조카 바오로, 고모 막달레나, 8촌 바오로 등이 순교하였고,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도 다시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부친 바오로와 백부 바오로, 형 요한과 손 바르바라 부부, 이모부 손 베드로와 손씨 부부 등이 3월에 순교하였고 장모 홍 유스티나가 11월에 순교하였다.

박해 후 그는 교회의 밀사 최지혁,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프랑스의 여러 신부들을 입국시켰고,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경험을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다. 그의 진술내용은 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 신부가 필사하여 남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성지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박순집은 서울 홍제동에 살고 있었는데 1888년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곧 최초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이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고 1890년에 로 이주하여 전교에 힘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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