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Bernardo Bertolucci ]

요약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성적, 정치적 차원에서 분열과 갈등을 다룬 이탈리아의 대표적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데뷔작 《죽음의 신》으로 호평받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 황제》를 찍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9개 부문상을 휩쓸었다.
출생-사망 1941.3.16 ~ 2018.11.26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영화감독
출생지 이탈리아 파르마
주요수상 1987년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마지막 황제 L'ultimo imperatore》
주요작품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Ultimo tango a Parigi》(1972), 《마지막 황제》(1987)

1940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던 그는 15세에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에서 근대 신학을 공부한 뒤 아버지의 친구였던 의 데뷔작 《아카토네 Accattone》(1961)의 조감독을 거쳤다. 1962년 시집 《미스터리를 찾아서 In cerca del mistero》로 프레미오 비아레지오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2년 로마에서 촬영한 데뷔작 《죽음의 신 La commare seca》(1962)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64년 24세에 젊은 좌파 지식인들의 패배감을 다룬 《혁명전야 Prima della rivoluzione》를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그러나 거듭 흥행에는 실패하고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하자 잠시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의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가했다. 영화에 고무된 그는 1968년 고다르의 형식을 흉내낸 《동반자 Il Sosia》를 찍었다.

1960년대 말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70년 《순응주의자 Il Conformista》를 발표하면서 존경해 마지 않던 고다르식의 영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영화는 그가 과거에 적이라고 생각했던 거대 자본 패러마운트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것이다. 또 보르헤스의 소설을 각색한 《거미의 계략 La Strategia del ragno》을 통해 정치문제를 영화와 결합시키는 제작자들을 비판했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Ultimo tango a Parigi》(1972)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파격적인 성행위의 묘사로 몇 달 뒤 상영이 금지되었다. 에로티시즘 논쟁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킨 이 영화 때문에 그는 두 달간 투옥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5년간 투표권을 잃었다. 1988년에야 무죄를 인정받았다. 이 영화가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4시간이 넘는 대작《1900년 Novecento》(1976)을 완성시켰다.

1980년대 들어 동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자서전 《나의 반생》을 영화화한 《마지막 황제 L'ultimo imperatore》(1987)를 찍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영화제에서 9개 부문상을 모두 휩쓸었으나 서구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1968년 정치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혁명과 자유에의 희구를 지녔던 사람들의 실패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영화 《스틸링 뷰티 Io ballo da sola》를 만들었다.

그 밖에 《루나 La Luna》(1979), 《어리석은 사나이의 비극 La tragedia di un uomo ridicolo》(1981), 《리틀 부타 Little Buddha》(1994) 등 많은 영화가 있다.

이러한 작품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제6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사자상을, 2011년 제 64회 칸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암으로 투병하다가 2018년 11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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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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