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삼국통일

[ 三國統一 ]

요약 7세기 후반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

고구려와 백제는 4~5세기 무렵에, 신라는 그 보다 늦은 6세기 이후에 국가의 틀이 잡히고, 사회발전도 이룩하였다. 또한 삼국간의 힘겨루기도 각국의 성장상황과 동아시아의 정세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 남북시대로 이어지는 분열기를 거치고, (隋)·(唐)의 통일제국시대로 이어졌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앞서의 중국분열시에 성장·발전이 가능했으며, 그 뒤 각국의 이해와 수·당의 영향과 성쇠에 따라, 교류와 반항이 복잡하게 변화했다.

신라는 5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백제는 475년 한강에서 남하,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 고구려가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되자, 신라·백제가 연합해서 이에 맞서 한강 이남의 땅을 화복하여 동쪽은 신라, 서쪽은 백제가 차지했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598년·612년 두 차례 고구려로 쳐들어 왔으나 실패했다. 그 다음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가 645년에 다시 고구려를 쳤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1) 백제의 멸망:백제는 신라와 분쟁을 계속하여 642년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하자, 신라는 위기에 처하고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뒤 당나라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660년 (蘇定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 김유신의 5만 병력과 합세하였다. 계백의 용전도 효과 없이 사비성이 함락된 후 4년간의 백제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백제는 망하였다.

2) 고구려의 멸망: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수·당과의 거듭된 항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하였으며, 665년 이 죽자 세력다툼으로 내분까지 일어나 668년 (金仁問)이 이세적의 당군과 협공을 가하자 감당하지 못하고 9월에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를 두었으며, 곳곳의 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3) 나당전쟁: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영토로 만든 당나라는 다시 신라까지 넘보았으나, 670년 신라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략, 나당전쟁으로 들어갔으며, 671년·675년, 그리고 676년에 군량보급 차단, 매소성전투, 기벌포(伎伐浦)대첩 등으로 당나라를 압박하여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랴오둥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4) 신라의 삼국통일: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한국 민족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고구려·신라·백제의 분립으로 언어와 풍속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던 것을 통일 이후 같은 민족으로의 융화 위에서 언어·생활·풍속이 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삼아, 융합·단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비록 고구려의 땅을 거의 잃는 불완전한 통일이었으며 융화정책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한반도의 융합은 후에 단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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