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깨는 사람들

돌 깨는 사람들

[ The Stone Breakers ]

요약 돌을 깨는 가난한 두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린 G.쿠르베의 작품.
작가 귀스타브 쿠르베
종류 유화
크기 1.6x2.59m
제작년도 1849년
소장 드레스덴 국립박물관(제2차 세계대전 중 소각)

1848년 프랑스혁명은 제2공화국을 이끌고 예술에서도 자유주의 사상을 낳았다. 프랑스혁명에 참가했던 쿠르베는 1849년 파리에서의 피곤함을 풀기 위해 고향인 오르낭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상과 예술을 한데 묶는 작품을 그렸다.

그림은 모자를 쓴 노인이 뙤약볕 아래서 무릎을 꿇은 채 도끼로 힘겹게 돌을 깨고 있다. 조끼는 낡아 너덜너덜하고 양말은 구멍이 나 있다. 뒤에 서 있는 소년은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찢어진 셔츠와 멜빵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지를 입고 무거운 짐을 한쪽 다리로 받치고 있다.

J.F.밀레도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쿠르베는 종교적 경건성이라든가 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당시 미술계의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쿠르베의 친구인 사회주의자 P.J.은 이 작품을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오르낭의 장례식》이 있는데 시골 들판에서 거행되는 소박한 촌사람들의 장례식 풍경이다. 장례식 참석자들은 일하다가 막 온 모습으로 남루한 차림이며 집례자들도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의 혁명가이자 의 선도자였다. 그는 J.A. 앵그르와의 논쟁에서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고 하여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1855년 파리 국제전에서 작품 전시가 거절되자 전시회장 근처에서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부터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화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미술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했다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후세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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