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 日本陸軍士官學校 ]

요약 군국주의 일본이 육군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
구분 사관학교
설립일 1874년
설립목적 군국주의 일본의 육군장교 양성

1874년 교토[京都]에 설립된 병학교[兵學校]로 출범한 이래 1886년까지 제11기생까지 졸업하였으며, 1887년에는 사관후보생제도가 되면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제61기생까지 재학하였으며, 졸업생은 5만 2000명이었다. 일본 군부 및 정계의 거물을 수없이 배출, 일본 근대사를 움직여 온 인물들을 양성해 낸 주요 교육기관의 하나이다. 이들 졸업생 중 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을 받은 7명 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기무라 효타로[木村兵太郞],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부도 아키라[武藤章] 등 6명이 이곳 출신이며, 종신형을 받은 16명 중 오지마 히로시[大島浩],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하타 슌로쿠[畑俊六], 우메즈 미지로[梅津美治郞], 미나미 지로[南次郞],스즈키 사다이치[鈴木貞一], 사토 겐료[佐藤賢了],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등 9명이 이곳 출신이다. 이곳 출신 중에는 조선 총독으로 악명을 남긴 미나미 지로와 고이소 구니아키도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 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은 8 ·15광복 후 군부의 형성과정에서 주도세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5 ·16군사정변을 통한 정치개입으로 한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학교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양적으로는 이때까지의 이 학교 졸업생 총수 5만 2000명의 0.3 %에도 못 미치지만, 이들이 한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국권침탈 이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선 노백린(盧伯麟)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成) 등 11기생 21명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지만, 상당수가 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내며 (大韓帝國)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한편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박영철(朴永喆) 등 15기생 8명은 때 일본군을 따라 참전한 뒤, 대한제국 군부의 중추를 이루어 군정 및 교육기관에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강점 이후 이들의 활동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국외로 망명, 독립군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하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총독정치 체제 속에서 안주하며 일제의 충성스런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박영철은 관직에 진출하여 도지사를 지내고, 또 금융계와 실업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는 등 핵심적인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 이후 이 학교를 졸업한 인물로는 홍사익(洪思翊) ·(李應俊) ·김정렬(金貞烈) ·신태영(申泰榮) 등 26기생과 김석원(金錫源) ·정훈(鄭薰) 등의 27기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실전에서도 명성을 날렸는데, 특히 홍사익은 1944년 중장으로 진급, 한국인으로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종전 뒤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 재직시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경력 때문에 전범자로서 처형되었다. 또한 김석원은 중 ·일전쟁 당시 북중국에서 용명을 떨쳤으며, 정훈은 조선군사령부의 고위급 참모로서 한국인들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8 ·15광복이 되자 한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장성의 지위에 올랐으며, 국방부 장관(신태영), 체신부 장관(이응준)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신생 대한민국 육군을 이끌어가기에는 고령이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의 실제 주역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 즉 계림회(鷄林會) 그룹이었다. 계림회는 1933년 이후 일본 육사에 유학한 한국인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모두 72명의 회원을 갖게 되는데, 일본육사 유학생 총수의 꼭 반에 해당한다. 26기 ·27기생 배출 이래 33년 49기생 입학 때까지 20여 년 이상 한국인의 육사 입학은 단절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49기생 채병덕(菜秉德)·이종찬(李鍾贊) 이후 이용문(李龍文)·이주일(李周一)·(朴正熙)·이한림(李翰林)·정내혁(丁來爀) 등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정권기에 군부 핵심인물로 활동하였고, 특히 박정희는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18년간 한국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참조항목

, , , ,

역참조항목

, ,

카테고리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