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객

가객

[ 歌客 ]

요약 가곡(歌曲)·가사(歌詞)·시조(時調) 등의 성악곡을 잘 부르던 사람.

시조집의 편찬자로 알려진 김천택(金天澤), 김수장(金壽長), 안민영(安玟英) 등이 유명하다. 조선 후기 숙종, 영조 때 활약했으며, 문헌상에 ‘가객(歌客)’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대에 이 부류를 두고 불렀던 호칭으로 추정된다. 이는 (掌樂院)에 소속되지 않은 여항(閭巷)의 한객(閑客)으로서 삼아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창하던 민간음악인이었다. 에게까지 우대받았다는 사실로 보아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창의 기능이 대단하였으며 지식이나 교양의 수준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海東歌謠)》에 수록된 <고금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를 통해 그 사정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에 거론된 가객 중에는 승지(承旨)를 지낸 허정(許廷), 지사(知事)를 역임한 장현(張炫)도 있다. 그러나 가객의 대다수는 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계급 출신들이 많았다. 가객은 동호인 집단을 만들어 서울 주변의 승지를 돌아다니면서 가창을 하기도 하고 사대부나 부호가 주최한 연회에 불려가기도 하였다. 특히 서울 거주 경아전(京衙前) 출신의 부호들이 고객이나 후원자로서 이들 가객과 연대되었던 사정이 밝혀지고 있다. 가객으로 널리 알려진 이세춘(李世春)의 경우에는 금객(琴客) 김철석, 기생 추월, 매월, 계섬 등과 더불어 한 무리를 이루어 여항의 수요에 대응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가객의 일반적인 생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 흐름에 따라 이들은 서울의 유흥적인 분위기를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생활 자체도 소비적·향락적으로 기울어졌다. 초기 가객인 김천택이 보여주던 다분히 사대부적 취향의 풍류적인 성격이 점점 사라지고 이후 유흥과 향락으로 흘렀던 것이 가객과 그들의 예술이 거쳐온 과정으로 판단된다. 현재 전해지는 의 상당 부분은 대략 이같은 가객의 성향과 그들이 벌이던 유흥의 분위기에서 빚어졌을 가능성이 짙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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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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