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일

한흥일

[ 韓興一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동부승지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주(神主)와 빈궁들을 강화에 호위하였다.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배종(陪從)하고 돌아와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후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 때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우의정까지 올랐다.
출생-사망 1587 ~ 1651
본관 청주
진보(振甫)
유시(柳市)
시호 정온(靖溫)
활동분야 정치

본관 청주. 자 진보(振甫). 호 유시(柳市). 시호 정온(靖溫). 1624년(인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1628년 수찬(修撰)을 거쳐 1630년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633년 이조좌랑이 되고, 1634년 전라도 양전사(量田使)를 거쳐 사간(司諫)을 지낸 뒤, (同副承旨) 때 이 일어나자 신주(神主)와 빈궁(嬪宮)들을 강화에 호위하고 좌부승지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우승지를 거쳐 1643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대군호행재신(大君護行宰臣)으로 배종(陪從)하고 돌아와 1645년 이조참판이 되고, 1647년 을 거쳐 1648년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후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 때 《(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고, 우빈객(右賓客)을 거쳐 1651년(효종 2) 에 올랐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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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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