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페르마

피에르 페르마

[ Pierre de Fermat ]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페르마

페르마

출생-사망 1601.8.17 ~ 1665.1.12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수학
출생지 보몽드로마뉴

1601년에 툴루즈 근처 보몽드로마뉴(Beaumont-de-Lomagne)에서 부유한 피혁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30세에는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이어 16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의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중에 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댓값과 극솟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였다.

데카르트, 메르센 등과 서간을 통하여 연구 성과를 통보하였으며 생전에는 그 연구 내용을 공간(公刊)하지 않았다. 또 이 서간은 결론으로서 얻어진 (定理)만을 표시하고, 방법을 풀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수학자에게 많은 과제를 남기게 되어 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연구 성과 가운데 우선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업적을 들 수 있다. 연속곡선(連續曲線)에 (接線)을 긋는 방법으로서 제기된 이 문제를 페르마는 ‘극값[極値]의 문제’로 유도하여 의 개념에 도달시킨 것이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런 성과가 얻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이것과 관련하여 극대극소(極大極小)의 문제를 연구하고, 이를 (光學)에 응용하여 ‘최단 시간의 원리(페르마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또 의 반사 ·굴절의 법칙을 유도해냈고, 후년의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하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와는 별도로 을 수립하여 3차원 공간을 취급하였다(데카르트는 2차원). 파스칼과의 서간에서는 확률을 논하여, 오늘날 파스칼과 함께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연구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整數論) 분야이다. 디오판토스의 수론서(數論書)에 자극되어 관여하게 된 이 분야에서는 소수수열(素數數列:페르마형 소수)의 추측에서 시작하여, 페르마의 대정리(np-n의 정리), 4n+1형 소수에 관한 제곱수[平方數]의 합의 정리, n=2의 디오판토스방정식의 해답의 정리 등에서 이른바 ‘최후의 정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통찰력이 발휘되어 정수론 연구사상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페르마가 발견하고 스스로 증명하였다고 하는 정리를 증명하는 데 상금까지 붙고 후년의 수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수이론은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미국 교수인 앤드루 와일스(Andrew Wiles)는 1993년 6월 23일 영국 뉴턴연구소에서 행한 강연중 이 정리의 증명을 제시하였으며, 그뒤 발견된 결함은 자신의 제자이자 교수인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와의 공동연구로 1994년 10월 보완하였다. 그 내용이 1995년 《수학연보 Annals of Mathematics》에 발표되어, 페르마의 '최후의 정리'는 공식적으로 증명되었다.

피에르 페르마 연보
출생 1601.8.17~ 사망 1665.1.12

1601

8월 17일 프랑스 보몽드로마뉴 출생.

1623

오를레앙 대학교 입학.

1626

법학 학사학위 수료.

1630

툴루즈의 청원위원을 지냄.

1648

툴루즈 지방의회 칙선의원을 지냄.

1665

1월 12일 프랑스 카스트르에서 사망.

1993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앤드루 와일스가 페르마의 ‘’를 증명.

1995

제자이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인 리처드 테일러와 일전의 증명을 보완하여 《수학연보》에 발표.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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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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