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위샹

펑위샹

[ 馮玉祥(풍옥상) ]

요약 중국의 군인 ·정치가. 민주화를 지향했고 1, 2차 봉직전쟁에 참가했다.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고 서북국민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북벌에 협력했으며, 반장(反蔣)운동을 펴다 실패했다. 항일전쟁 중 국공합작 이후 국방최고위원이 되었다.
펑위샹

펑위샹

출생-사망 1882.9.26 ~ 1948.9.1
국적 중국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安徽省] 출생. 바오딩무비학당[保定武備學堂]을 졸업하였다. 민주화를 지향하였으며 그리스도교도 장군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段祺瑞]의 안푸파[安福派]에 속하였으나 뒤에 즈리파[直隷派]에 가담하여 1922년 봉직전쟁(奉直戰爭)에 참가하고, 산시[陝西] ·허난[河南] 도독을 지냈다. 그러나 1924년의 제2차 봉직전쟁 때는 반기를 들어 펑톈파[奉天派]와 손을 잡아 즈리파의 차오쿤[曹錕]을 몰아내고 [北京]을 점령하여 전(前)청나라 황제 [溥儀]를 추방하였으며, 국민군 제1군사령 겸 전군총사령이 되어 세력을 떨쳤다.

곧 펑톈파와도 불화가 생겨 1925년부터 반제(反帝) ·반군벌의 민중운동에 영향을 받아, 11월 장쭤린[張作霖]을 타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6년 모스크바에 갔다가 돌아와 에 입당하고, 서북국민연합군 총사령으로서 북벌에 협력하였다. 1928년 펑톈군을 쫓아내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나 장제스[蔣介石]와는 시종 이해가 대립하였으며, 1930년 반장(反蔣)운동을 펴다 실패하여 제명되었다.

항일전쟁 중 당에 복귀하여 충칭[重慶]의 장제스 밑에서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였으나 장제스의 파쇼화에 반대하고 과 행동을 같이하였으며, 1937년 (國共合作) 이후 국방최고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국에서 반장 성명을 발표하고, 1949년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소련을 거쳐 귀국하던 중 흑해에서 타고 있던 배에서 화재로 죽었다. 그의 아내 리더취안[李德全]은 중공 정부의 초대 위생부장 ·적십자회장 등의 요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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