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후궁

[ 後宮 ]

요약 후비(後妃)·여관(女官) 등이 거처하는 궁전.

한국에서는 특히 임금의 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원래 중국 천자(天子:황제)가 거처하는 궁중의 전전(前殿) 뒤에 있는 깊숙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세계의 (禁斷의 장소)과 유사하다.

중국 천자의 궁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외조는 천자가 주권자로서 백관(百官)을 접견하고 정치를 주제하며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반면 내정은 천자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황후 이하의 부녀와 미성년의 아이들 및 환관(宦官) 등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보내는 장소이다. 이 내정이 후궁으로, 그 구성인원은 여자가 다수를 점하므로 이 궁중의 여자들도 후궁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의 베이징[北京] 궁성에서는 건청문(乾淸門)이 내정과 외조와의 경계를 이루어, 환관이 이 밖으로 나가거나, 관료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다.

중국은 고래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로 내려와, 처첩(妻妾)의 수는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많음은 유교(儒敎)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 주공(周公)이 제정하였다고 전하는 《(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女官)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後世)의 천자인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백낙천(白樂天)이 당(唐)나라 현종(玄宗)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後宮佳麗三千人”이라 읊은 바와 같이 많은 여인을 후궁에 두었다. 《진서(陳書)》에 “寵傾後宮”이라 한 것처럼 천자의 총애는 정처(正妻)인 후(后)보다는 첩인 3부인(三夫人:貴妃 ·貴嬪 ·貴人) 이하의 여인들에게 기울어져, 후궁이라는 말은 거처하는 장소나, 후(后)를 포함한 천자가 거느렸던 모든 여인을 뜻하기보다는, 천자 또는 임금의 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자가 궁중에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은 그 후사(後嗣)를 얻음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천자가 여색에 빠져서 건강을 해쳐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고, 한 왕조의 말기에는 천자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빚기도 하였다. 후궁에서의 연락(宴樂) 때문에 정치를 망친 천자의 예는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漢)의 성제(成帝), 진(陳)의 후주(後主), 수(隋)의 양제(煬帝)가 꼽히는데, 후궁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나라 현종의 예는 특히 유명하다.

한국에서 임금의 첩으로서 후궁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고려에서는 왕의 적처(嫡妻)를 왕후라 하고, 그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하여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호칭을 하였으며, 후궁인 부인들에게는 내명부(內命婦) 벼슬인 귀비(貴妃)·숙비(淑妃)·덕비(德妃)·현비(賢妃)의 명칭과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이 명칭은 정종(靖宗) 이후 궁주(宮主)·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 개칭이 빈번하였다. 고려에서 후궁이 많았던 왕으로는 태조로서, 그는 건국과정에 호족(豪族)·공신(功臣)·귀화귀족(歸化貴族)들을 회유하기 위한 혼인정책으로 제1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부르고 부인이라 칭한 후궁만 20명이 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禮)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종4품)·소원(昭媛:정4품)·숙용(淑容:종3품)·소용(昭容:정3품)·숙의(淑儀:종2품)·소의(昭儀:정2품)·귀인(貴人:종1품)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嬪:정1품)이라 하였다. 이 빈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소용·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다. 경종(景宗)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 등 선원보(璿源譜)에 올라 있는 역대 빈들은 거의 후자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후궁은 규정으로만 하여도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세종·성종·선조·영조와 같이 치적(治績)이 뚜렷하다고 후대에 인정받은 왕들은 후궁의 수가 많아,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이 9명이었고, 자녀를 낳지 않아 선원보에 오르지 않은 여인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897년( 1)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황제국으로 격상하면서 귀비·귀빈·귀인 등 중국과 같은 호칭으로 올랐고, 이를 아울러 3부인(夫人)이라 하였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 , , , , ,

카테고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