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

홍진

[ 洪震 ]

요약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출생-사망 1877.10.3 ~ 1946.9.9
본관 풍산(豊山)
만오(晩悟)ㆍ만호(晩湖)
본명 홍면희(洪冕熹)
별칭 홍진(洪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청북도 영동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호는 만오(晩悟)ㆍ만호(晩湖)이다. 본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이다. 충청북도 영동 출신으로, 1896년 남숙희(南叔熙)의 딸 남상복(南相福)과 결혼하여 아들 홍기택(洪起澤)을 낳았다.

홍진은 1877년 10월 3일(음력 8월 27일) 홍재식(洪在植)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의 3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1906년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의 주사가 되었으며, 그 뒤 한성평리원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 등을 지냈다. 1908년 의병사건에 대한 기소를 거부하다가 검사의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이듬해 평양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국권 침탈 이후에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호 활동을 펼쳤고, 1919년 3·1 운동 때 충청북도 청주군의 연락책임자로 활동했다. (漢城臨時政府)가 선포되었을 때에는 법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4월 (李奎甲)과 함께 한성임시정부의 문건을 가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는데, 이때부터 '홍진(洪鎭)'이라는 이름을 썼다. 같은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는 임시의정원 의원과 법제위원장 등을 지내며 조직체계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1921년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단장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6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는 한자를 바꾸어 '홍진(洪震)'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27년 임시정부의 대표로 만주로 파견된 홍진은 그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북만주 지역에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했으며, 1930년에는 (池靑天) 등과 함께 (韓國獨立黨)을 만들어 중앙위원장 등을 지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독립당은 한국독립군을 편성해 항일투쟁을 벌였으나, 만주 전역이 일본군에 점령되자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한국독립당은 1934년 난징에서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新韓獨立黨)을 결성했는데, 이때 홍진은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35년 독립운동정당과 단체들이 연합하여 (民族革命黨)을 결성했을 때에는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의열단 출신의 인물들이 당권을 장악하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당ㆍ한국국민당 등과 함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해 선전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ㆍ조선혁명당ㆍ한국국민당이 통합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했을 때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2월에는 한국독립당에서 탈당하여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해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방이 되자 같은해 11월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이듬해 2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심장 질환으로 그해 9월 9일에 사망했다. 장례는 김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치렀으며, 인천의 관교동에 안장하였다. 1984년 서울의 국립묘지로 이장되면서 현재 인천에는 시립박물관에 묘비만 전시되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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