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섬

홍섬

[ 洪暹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의 무고로 유배,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풀려나왔다. 그 후 좌찬성 겸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이 과중하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홍섬 신도비

홍섬 신도비

출생-사망 1504 ~ 1585
본관 남양(南陽)
퇴지(退之)
인재(忍齋)
시호 경헌(景憲)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인재집》,《인재잡록(忍齋雜錄)》

본관 남양(南陽). 자 퇴지(退之). 호 인재(忍齋). 시호 경헌(景憲). (趙光祖) 문하에서 수학,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正言)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 (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興陽)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풀려나왔는데, 이때의 심경을 〈원분가(寃憤歌)〉에 담아 읊었다. 그 후 수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뽑히고, 1558년 좌찬성 겸 이조판서, 이듬해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이 과중하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양(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임, 1563년 판사(義禁府判事)로 복직되어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내고, 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정무를 맡아 처리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1571년 좌의정이 되어 1573년 궤장(几仗)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1579년 지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다. 경서(經書)에 밝은 문장가로, 문집에 《인재집》 《인재잡록(忍齋雜錄)》이 있다. 1553년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중신기景福宮重新記》를 남겼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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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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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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