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위원부

파리위원부

[ 巴里委員部 ]

요약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대표들이 전후의 여러가지 사안들을 협의하고자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했다. 이에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국민대표로 (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파리에 도착했는데, 동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이 되어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주파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10일 그는 '독립공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과 개별접촉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 지원을 호소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녈 대회(만국사회당 대회)에서 파리위원부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과 (趙素昻)을 대표로 참여시켜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8월에 대통령 이승만의 소환명령으로 김규식은 미국으로 떠나고, 이관용이 위원장대리, (黃玘煥)이 서기장이 되어 위원부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0월 10일에는 이관용의 사임으로 황기환이 외교 및 선전활동을 전담하였다. 즉 《자유한국》 등의 책자를 영문·불문으로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는 한편, 한국에 관한 기사를 181종의 유럽 신문들에 517회에 결쳐 게재시키는 등 눈부신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영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맡을 대영제국한국친우회(大英帝國韓國親友會)가 결성되었다. 파리위원부는 이같이 외교·선전 활동을 1923년까지 파리와 런던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유럽 각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고양(高揚)시켰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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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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