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용

토용

[ 土俑 ]

요약 무덤의 껴묻기용[副葬用]으로 만든 토제의 인물상(人物像).

넓은 의미에서는 인물상과 같이 껴묻기된 동물과 기물상(器物像)도 포함한다. 중국의 토용은 원래 노예의 모사품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상대(商代)와 서주(西周)시대에는 사람의 순장이 유행하였는데, 춘추시대 이후 대량의 노예 순장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사람을 본떠 만든 토용이 등장하여 이를 무덤에 순장하는 새로운 습속이 유행하였다. 처음에는 풀이나 짚으로 엮어 만들었으나 이후 흙과 나무를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용(俑)의 형상은 주로 노복(奴卜)·무악(舞樂)·사병(士兵)·의장(儀仗) 등과 안마(鞍馬)·우차(牛車)·부엌용구와 가축 등의 모형이다.

진대(秦代) (始皇帝)의 능에서 나온 방대한 양의 병마용(兵馬俑)은 시황제가 사후 세계에 가서도 거느리고자 한 진나라의 군단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대(漢代)에도 도용(陶俑)이 크게 발달하여 인물·동물·건축물·생활용구 등 내용물이 다양하고 풍부해지며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나타낸 것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말기부터는 유약을 바른 도용이 출현하여 당대까지 성행하며, 북송(北宋) 이후 점차 쇠락하지만 명대(明代)까지 토용은 무덤에 계속 껴묻기되었다.

한국의 토용은 신라에서 그 예가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오면 백자로 무덤에 인물·동물·생활용기 등을 만들어 명기(明器)라 하여 껴묻기한 것이 있다. 1968년에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石室古墳]에서 토용이 돌방 네 구석에 놓여진 상태로 발견된 바 있고, 경주 시내 용강동과 황성동의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에서 시립(侍立)하거나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문관상(文官像)·병사상(兵士像)·여인상·서역인상(西域人像)과 수레바퀴 등이 발견되어 당시의 인물상, 복식 연구, 동서 문화의 교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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