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타틀린

블라디미르 타틀린

[ Vladimir Evgrafovich Tatlin ]

요약 러시아의 화가이며 조각가. 구성주의(구축주의)의 탄생에 기틀을 마련했다. 전통적인 개념의 회화를 부정하고 ‘실제 공간 안에 존재하는 실제 물체’로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새로운 형식미를 창조했으며, 예술의 사회적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가 제작한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은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생-사망 1885.12.28 ~ 1953.5.31
별칭 구성주의(구축주의)의 아버지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회화, 조각, 무대 장치, 건축
출생지 러시아 모스크바
주요작품 《선원 모습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ailor》(1911), 《코너 카운터릴리프 Corner Counter Relief》(1915),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1919~1920), 《리타틀린 Letatlin》(1929~1931)
주요업적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립에 중추적 역할 수행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은 1885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스크바의 회화.조각. 아카데미에서 발렌틴 세로프(Valentin Aleksandrovich Serov)와 콘스탄틴 코로빈(Konstatin Alekseyevich Korovin)에게 회화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펜자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타틀린은 미술 공부를 하면서 배를 타고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선원이나 낚시꾼의 모습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그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틀린의 적 성장에는 1913년 파리에서 만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타틀린은 금속판과 를 이용해 만든 피카소의 실험적 입체주의 작품 《기타 Guitar》(1913)을 접한 후 러시아로 돌아와 전통적 회화기법을 중단하고, ‘역(逆) 부조’라는 의미의 ‘카운터릴리프(Counter relief)'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무나 철사, 판지, 금속판 등의 기초 재료들을 일련의 유사한 기하학적 형태들로 배열하여 실내의 모서리를 가로질러 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회화의 평면 속에 가상으로 존재하던 삼차원적 요소를 실제 공간 안에 존재하는 실제 물체로 대체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이 러시아 구성주의(구축주의)의 시작이었다.

타틀린은 1915년 ‘러시아의 마지막 입체미래주의 전시 0.10’전에 《코너 카운터릴리프 Corner Counter relief》를 출품했다. 철판과 나무 조각, 노끈을 결합시킨 이 작품은 최초의 추상 조각 중 하나로 벽과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이 전시회는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가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1915)으로 그의 절대주의를 출범시킨 전시회이기도 했다. 말레비치 작품의 바로 맞은편에 전시되었던 《코너 카운터릴리프》는 철저하게 반(反)말레비치적인 작품이었다. 말레비치는 예술에 내재하는 모든 물질성을 배제한 반면, 타틀린은 냉정한 유물론적 태도로 재료의 물질적 속성에 집중했다.

상징과 환영을 다루는 미술세계에서 벗어나 실재 사물과 시간, 공간의 세계에 발을 디딘 타틀린은 다른 미술가 및 문학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10월 혁명에 수반한 정치적 이념은 미술가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미술가들이 볼셰비키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혁명의 이상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구성주의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은 이러한 주제에 걸맞은 건축적 조각이다.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은 국제 공산당 기관인 코민테른의 본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설계되었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에펠탑을 압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에펠탑보다 90m 이상 높은 396m 높이로 모스크바 한 가운데 세워질 예정이었다. 와 철골로 된 이 개방된 구조물은 그 안에 회의실과 정보센터, 방송국을 갖추고 있으며, 육면체, 원기둥, 반구, 원뿔 등 기하학적 구조물이 각각 다른 속도로 회전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유토피아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인류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면서 진보하고 있음을 연속적인 형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하고 그 모형으로만 남아 있지만, 만약 완성되었다면 에펠탑보다 더 대담하고 새로운 구축주의 건축물이 되었을 것이다.

1920년부터 구성주의 미술가들 사이에 순수 예술을 추구하는 경향과 예술의 정치적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Naum Gabo)와 앙투안 페브스너(Antoine Pevsner)는 모스크바를 떠나 서방 세계로 망명하여 구성주의의 국제적 확산에 기여했다. 반면에 타틀린과 알렉산드르 롯첸코(Aleksandr Mikhailovich Rodchenko)는 그대로 남아 새 정권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에 맞추어 자신들의 정치적인 예술세계를 전개시켰다. 타틀린은 재료와 형태에 대한 예술적 지식을 실제로 응용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방한복, 가정용 난로, 가구 등 일상의 대량 생산 소비재를 했다.

타틀린은 1929년부터 1인용 비행기 ‘리타틀린 Letatlin’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모터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 동력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타틀린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열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등에 장식을 의뢰받기도 했지만, 1930년대 이후 구소련의 미술 지도 방침의 변화에 따라 그 활동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타틀린은 195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구성주의는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건축, 무대 미술, 상업 미술의 영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나 신조형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주요 작품에는 《생선 장수 The Fishmonger》(1911), 《선원 모습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ailor》(1911), 《코너 카운터릴리프 Corner Counter Relief》(1915),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1919~1920), 《리타틀린 Letatlin》(1929~1931) 등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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