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쿡

제임스 쿡

[ James Cook ]

요약 영국의 탐험가, 항해가. 캡틴 쿡(Captain Cook)으로도 불린다.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탐험에 이어 1772년 남극권에 들어갔다. 1776년에는 북태평양 탐험을 떠나 베링 해협을 지나 북빙양에 도달했다. 그의 탐험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의 위치와 명칭이 결정되고 현재와 거의 같은 태평양지도가 만들어졌다.
쿡

출생-사망 1728.10.27 ~ 1779.2.14
별칭 캡틴 쿡
국적 영국
활동분야 탐험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요크셔주

1728년 영국의 북부 요크셔의 빈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고용되어 있던 농장 지주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다녔다. 1746년 상선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했으며 이때부터 바다에 매료되었다. 그가 탑승한 상선은 프리러브 호였는데 주로 석탄을 운반했다. 거의 8년 동안 상선을 타고 북해를 오가며 항해술을 익혔다. 1755년 상선의 갑판장을 그만두고 대영제국의 수병으로 해군에 입대하였다. 해군에 입대하면서 제임스 쿡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의 때에는 캐나다로 출동하였고, 노바스코샤 주에서 활동하며 퀘벡 공략에도 종군하였다. 당시 제임스 쿡은 영국 공병대에서 지형을 측량하는 기술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원리를 적용해서 해군에서 사용하는 지도를 다시 제작했다. 제임스 쿡이 제작한 지도는 정확했으며 그 당시까지 사용하였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후에도 캐나다 뉴펀들랜드·래브라도 해역의 측량하였고, 일식 관측 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영국해군의 함선들이 캐나다 해안을 안전하게 항해하고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임스 쿡이 정확한 측량과 관측을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는 영국해군에서 높이 평가받았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1767년 해군 대위로 승진하였다.

1768년 영국해군은 태평양에서 실시한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과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관측하기 위해, 탐험 선단을 구성하였다. 제임스 쿡은 뛰어난 항해술 뿐만아니라 측량과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탐험대 관측대장에 선임되었다. 탐험대을 태운 범선은 엔데버 호(號)였고 제임스 쿡은 이 배의 선장이 되어 탐험대를 인솔하게되었다. 이 항해를 제임스 쿡의 제 1차 항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탐험대에는 천문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 등 많은 과학자들과 동행하게 되었고,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를 거쳐 남아메리카 최남단 케이프 호른(cape horn)을 지나 태평양으로 넘어갔다. 이들 탐험대는 타히티섬에서 도착하여 관측과 실험을 하였다. 남태평양을 항해하면서 소시에테제도(諸島)를 발견하는 등 여러곳의 새로운 섬을 발견했지만, 제임스 쿡의 탐험대의 중요한 목적 중에는 남극대륙을 발견하는 임무가 있었다. 하지만 탐험대는 남위 40°를 항해했고 그 아래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는 못했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였다. 쿡은 뉴질랜드 해안가를 따라 항해하면서 이곳이 남극땅인 줄 알았으나 마오리족이 이땅의 주인임을 알게되었고 뉴질랜드가 남극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남북으로 두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발견으로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 사이의 해협을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였고, 이때 발견한 곳을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라고 명명하여 영국 영토로 선언하였다. 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하였고 아프리카 최남단 을 돌아 다시 대서양을 거쳐 1771년 7월에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1772∼1775년의 제2차 항해 때는 해군성의 명령으로 오래전부터 수수께끼인 남방 미지의 대륙(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을 찾아 사상 처음으로 남극권까지 들어가는 항해를 하였다. 1772년 7월 리졸루션 호(號), 어드벤쳐 호(號) 두척의 범선으로 탐험대를 구성하였고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남위 71°10'까지 남극권까지 남쪽으로 항해했으며 이 기록은 당시 대단한 항해기록으로 평가되었다. 2만km 이상을 항해하여 남극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를 했지만 결국 남극대륙을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해역에 남극대륙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탐험은 이후의 남극탐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3년 8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쿡은 영국왕립협회로 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정회원이 되었다. 또한 이전 1차 항해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던 의 희생자를 한사람도 내지 않은 공적도 표창하였다.

그후 영국 정부는 오랫동안의 현안이었던 대서양·태평양의 통로를 발견하는 일을 포함한 북태평양의 탐험을 계획하였고, 쿡은 스스로 탐험대장을 지원하여 2차 항해에서 사용했던 레졸루션호(號) 및 디스커버리호를 이끌고 1776년 2월에 출항하였다. 대서양을 정남향으로 내려가 희망봉을 지나고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메니아 섬을 거쳐 뉴질랜드에 도착하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선원들이 원주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타히티에 정박하여 북태평양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이듬해 1월 북쪽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쿡은 화산섬인 샌드위치(현재 하와이) 제도를 발견하였고, 여기에서 북아메리카 연안을 북으로 따라 올라가서 알래스카 남부를 지나 6월 말 베링 해협으로 들어가 북빙양(北氷洋)에 도달하였으나, 8월 중순 두꺼운 빙판에 막혀 더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탐험대는 재기를 기약하며 11월 말에 샌드위치 제도로 귀환하였다. 섬의 원주민들은 일행을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디스커버리 호의 수리를 위해 이듬해 2월까지 체재하였다. 하지만 원주민과의 분쟁이 일어나, 전투를 벌이다가 2월 14일 쿡은 한 원주민의 돌창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일행은 쿡의 유지(遺志)에 따라 재차 베링 해협에 들어가 북위 70°33'까지 진출하였으나, 이번에도 돌아올 수밖에 없어 1780년 10월 귀환하였다. 3회의 항해·탐험에 의하여 태평양의 많은 섬들의 위치와 명칭이 결정되었고, 현재와 거의 같은 태평양지도가 만들어진 공적 이외에도, 여러 곳의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민족학적 조사와 동식물의 분포도 밝혀져 과학적 탐험의 열매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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