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칼리굴라

[ Caligula ]

요약 고대 로마의 제3대 황제(재위 37∼41).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책으로 원로원 ·군대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키고 독단적인 정치를 강행하여 비난을 받았다. 황제 근위대 장교에게 암살되었다.
출생-사망 12.8.31 ~ 41.1.24
국적/왕조 고대 로마
재위기간 37년 ~ 41년
본명 Gaius Caesar Germanicus
활동분야 정치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Caesar Germanicus)이며 본명은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이다. 칼리굴라는 로마 남쪽 해변도시 안티움(현재: 안치오 Anzio)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고 어머니는 (Augustus) 황제의 손녀인 (Agrippina)이다. 그리고 위로는 두 명(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형이 있었다. 칼리굴라는 그가 어렸을 때 의 국경인 라인강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병영에서 자랐다. '칼리굴라'의 이름은 당시 로마군 군화인 칼리굴라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유아용 를 고다녔는데 그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붙혀준 별명에서 유래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근무지를 바뀌게 되자 칼리굴라도 그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로마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Tiberius)가 황제였지만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머니와 두 형은 모두 국가반역죄로 유배형을 받아 사망했다. 21세가 되어 첫 공직은 회계감사관이 되었으며 첫번째 부인은 아기를 출산하다 아기와 함께 사망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자 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에 은둔하며 지낸 티베리우스 황제에 비해 젊은 황제의 등장을 환영했다. 즉위 초 칼리굴라가 시행한 정책은 민심수습책으로 세금을 축소하고 검투사시합과 전차경주대회를 부활하는 등 원로원 ·군대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칼리굴라는 앞선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다져놓은 제국의 통치 기반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급격한 정책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로마제국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인간세계에 나온 신(神)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는 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다. 그리고 로마시민들의 인기를 모으기 위해 추진한 정책은 국고의 무모한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켰다. 게다가 군사를 이끌고 를 거쳐 국경까지 순행하였지만 뚜렷한 목적과 결과가 없이 돌아와 개선식을 치르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등 속국들과 분쟁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신권통치를 주장하며 이스라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칼리굴라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대중을 위한 선심성 정책을 추진했는데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뗄감에 세금을 징수하는 등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일련의 일 때문에 선심정책을 추진했음에도 그의 인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칼리굴라는 선황제 티베리우스에 비해 일반 대중앞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서기 41년 로마에서 한 연극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최측근 근위병 대대장인 카이레아 등 몇몇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칼리굴라가 살해된 직접적인 동기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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