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

춘화

[ 春畵 ]

요약 남녀간의 성희장면을 나타낸 그림이며 조선시대 신윤복의 그림이 유명하다.

춘정화(春情畵)·춘의화(春意畵)·운우도(雲雨圖)라고도 한다. 춘화에 대해 학술적인 관점에서 정리 또는 그 개념을 규정한 사례는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남녀간의 성애 및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그림을 일컫는 경우가 많으며, 서구의 에로틱 아트를 동양권의 춘화와 비교할 때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춘화의 기원은 기원 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대(漢代)의 한 왕자는 자신의 접견실을 벌거벗은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병풍으로 장식했다고 하며, 한의 재상 진평(陳平) 역시 향락용으로 춘화를 그렸고, 당대(唐代:618~906)에는 기방의 머리병풍으로 춘화가 많이 그려지고 사용되었다.

특히 에서는 여러 여성과 다양한 방법으로 성행위를 가짐으로써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바, 이러한 생각은 6, 7세기경 인도에서 풍미하던 (Tantrism)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많은 문학작품이 성희를 소재로 집필되고 그 속에 그려진 의 경우 남녀의 육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고 채색 또한 화려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13세기 가 일종의 종교로 정립함에 따라 노골적으로 성애를 다룬 소설과 그림이 사라진 대신 바늘에 실을 꿰는 여인을 돕고 있는 연인처럼 성행위를 매우 상징적,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에서 춘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호색문화가 크게 성행했던 명대(明代:1570~1640)로서 채색목판화 기술의 발달에 따라 춘화의 제작과 보급은 다시금 활발해졌다. 이 시대의 유명한 화가인 당인(唐寅)과 구영(仇英)은 완전히 벌거벗은 남녀가 여러 가지 체위로 성행위를 벌이고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들의 이러한 그림은 후에 솜씨가 빼어난 많은 장인들에 의해 채색목판화로 모사되었으며, 1606년에 간행된 《풍류절창(風流絶暢)》은 24개의 채색판화로 구성된 것으로서 당인의 《춘투도(春鬪圖)》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당대의 풍류문인들은 이러한 춘에 시를 겻들이기도 했으며, 이 화첩은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이 시대에 제작된 다른 춘화첩을 보면 성행위를 끝낸 남녀가 에서 일어서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치마끈을 묶고 있는 여성을 위해 윗도리를 들고 있는 남성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도 있으며 남녀의 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춘화도 발견된다.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던 명대에 제작된 춘화첩 중 가장 뛰어난 채색목판화집으로 1642년에 간행된 《원앙비보(鴛鴦秘譜)》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청대(淸代)에 이르러선 검열에 의해 춘화가 엄격하게 통제되고 과거의 많은 춘화첩이 파손되지만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성교육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체위를 묘사해 놓은 화첩이 유통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아편전쟁 기간 중에는 이 춘화첩이 백인들에게 전해져 과 같은 변태적인 성행위를 위한 최음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명대 후반에 유행했던 이러한 춘화첩은 한국과 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이미 [平安時代:794~1185]에 중국의 춘화집이 소개되었으나 의학용 교재로 사용되었을 뿐 춘화를 촉진시키지는 않았다. [江戶時代:1615~1867]에도 중국의 춘화가 유입되었으며 당시 일본 춘화는 중국 춘화의 표현양식을 일본식으로 번안한 사례를 보여준다. 일본의 춘화는 [浮世繪] 화파의 등장과 더불어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일본 화가들은 남녀의 가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거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춘화가 옷을 반쯤 걸친 반라의 상태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성기 부위가 과장되거나 채색이 화려하다는 점 등은 일본춘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시대 자유연애의 사례를 보여주는 (俗謠)를 보면 춘화 또한 은밀하게 유통되었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으나 그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려 왕조가 원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원의 왕실을 통해 중국 춘화가 고려 왕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춘화는 조선 후기에 성애소설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춘화는 18세기부터 까지 크게 유행했으며, 조선 후기 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당대의 뛰어난 풍속화가들이 춘화를 제작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 춘화는 단지 향락을 자극하는 도색화로 머문 것이 아니라 예술성 또한 뛰어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례로서 단원 (檀園 金弘道)의 서명과 이 찍힌 《춘화사계첩(春畵四季帖)》을 들 수 있다.

사계절을 배경으로 그려진 이 춘화첩은 배경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주제와 잘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필치 또한 유려하다는 점에서 높은 회화성을 지녔다. 단원의 뒤를 이어 혜원(蕙園) (申潤福)은 성심리묘사가 탁월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당에서 교미하고 있는 개를 보고 있는 기생과 몸종을 그려놓은 것이나 단오날 냇가에서 멱을 감고 있는 아낙을 훔쳐보고 있는 수좌승을 그려놓은 풍속화에서 볼 수 있듯이 남녀간의 성행위뿐만 아니라 과 관련된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 후 성행위를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해 놓은 춘화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서명이나 낙관이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누가 그린 것인지 확인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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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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