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군

창해군

[ 滄(蒼)海郡 ]

요약 BC 128년 중국의 한(漢) 무제(武帝)가 예맥(濊貊) 지역에 설치한 군(郡)으로, 한(漢)이 한반도 방면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이다.

창해군(蒼海郡 혹은 滄海郡)은 BC 128년 중국의 (漢) (武帝, BC 156 ~ BC 87)가 예(濊)의 지역에 설치한 군현(郡縣)이다. BC 128년 예(濊)의 군장(君長)인 남려(南閭)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 ? ~ BC 108)에 반기를 들고 자신이 이끄는 28만의 인구를 이끌고 한의 요동군(遼東郡)에 복속(服屬)해 오자, 한 무제는 예(濊)의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한서(漢書)》의 무제기(武帝紀) 원삭(元朔) 원년조(元年條)에는 “가을에 동이(東夷)의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 인구 28만명이 투항하여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조(濊條)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와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등에는 창해군(蒼海郡)의 설치에 팽오(彭吳)라는 고인(賈人, 상인)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서(漢書)》에는 “팽오(彭吳)가 구멍을 뚫듯 (濊貊) 조선(朝鮮)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燕)과 제(齊)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漢) 무제(武帝)는 팽오(彭吳) 등에게 요동군(遼東郡)에서 창해군(蒼海郡)에 이르는 교통로를 닦게 하였지만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어 공손홍(公孫弘, BC 200 ~ BC 121) 등의 건의를 받아 교통로 개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BC 126년에 창해군(蒼海郡)도 폐지하였다. 한(漢) 무제(武帝)는 서남이(西南夷) 정벌에서 그 지역과 교역하던 상인(商人)들의 정보에 기초해 교통로를 확보하여 쓰촨[四川],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등의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마찬가지로 예맥(濊貊)이나 조선(朝鮮), 남쪽의 진국(辰國) 등과 교역하던 상인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창해군(蒼海郡)으로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이른바 동이(東夷) 지역으로의 진출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창해군은 한의 재정 문제 때문에 설치된 지 2년만에 폐지되었지만 만주(滿洲)와 한반도 방면으로의 한(漢)의 진출을 촉진하였다. 그리고 한과 조선(朝鮮)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부추겼다. 결국 BC 109년 한 무제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유로 조선(朝鮮)을 공격하였다. 한(漢)은 BC 108년 왕검성을 점령하여 조선을 멸망시켰고, BC 107년까지 이 지역에 4개의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이라 불리는 4개의 군현(郡縣)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玄菟郡)은 창해군이 있었던 예(濊) 지역에 설치되었다.

창해군은 한(漢)이 한반도 인근 지역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郡縣)이며, 한사군 가운데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현도군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사군과 마찬가지로 창해군도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예(濊)와 관련된 《후한서(後漢書)》 등의 기록에 근거해 강원도 북부 해안의 동예(東濊)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위만조선의 영역을 직접 뚫고 교통로 개설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러한 해석은 비판되고 있으며,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남부 지역이나 지린성[吉林省] 남부의 압록강 중류 지역 등에 위치하였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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