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평

좌평

[ 佐平 ]

요약 백제의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16관등(官等) 중 제1품으로서, 좌평(左平)·좌솔(左率)로도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신분과 벼슬의 높고 낮음만을 표시하는 관등이었으나, 점차 구체적인 업무를 가진 관직으로도 쓰인 듯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古爾王) 27년(260)에 16관등제와 함께 처음 설치되었으며,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銀花]으로 관(冠)을 장식했다고 했다. 이에 많은 학자들은 고이왕이 이제껏 군사·행정 업무를 주관하던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대신해 새로 좌평 벼슬을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고이왕은 귀족 및 지방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좌평이라는 이름은 《주례(周禮)》에 나오는 6관(官) 가운데 가장 높은 정무관(政務官)인 하관(夏官) 사마(司馬)의 임무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以佐王 平邦國]"에서 따왔으며, 좌평을 처음 설치한 시기도 5세기 후반이거나 4세기 무렵보다 빠를 수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4년(408)에 6좌평 위로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나랏일을 총괄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고이왕 때 처음 설치한 좌평의 역할이 점점 확대되자 상좌평을 새로 두었으며, 이로써 상좌평이 좌평회의를 주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풀이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후 점차 좌평의 위상이 약해져 의자왕(義慈王) 때에는 실질적 권한을 상실한 채 명예직처럼 변하고 말았으며, 대좌평(大佐平)이라는 새로운 자리도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를 비롯해 《북사(北史)》·《한원(翰苑)》 등에는 백제의 좌평이 5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6명의 좌평이 각각 맡은 일을 소개해 놓았다. 이 때문에 《주서》가 편찬된 7세기 전반기 무렵까지는 백제의 좌평이 5명이었다가 7세기 중엽으로 들어설 무렵 6좌평제로 바뀌었으며, 《삼국사기》의 고이왕 때 6좌평제가 신설되었다는 기록은 나중에 일어난 일을 사관(史官)이 잘못 소급시켜 기재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이처럼 좌평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이 다양한 것은 좌평이 백제의 정치·경제·군사·행정·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높은 지위의 벼슬이었던 데 비해 그 실체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은 너무 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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