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 朝鮮靑年總同盟 ]

요약 1924년 220여 개의 사회주의 계열 청년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연합회.
구분 청년단체연합회
설립일 1924년 4월
설립목적 사회주의 단체들의 결속
주요활동/업무 좌경 청년단체 규합

1919년 3·1운동 후 일제 식민지정책의 전환(문화정책 실시)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조의 유행으로 국내에 각종 청년단체가 난립, 2·3년 사이에 2천여 개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청년단체들은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박일병(朴一秉) 등 뜻 있는 청년지도자들은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1922년 제3회 정기대회에서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한신교(韓愼敎) 등이 주축이 되어 좌경 청년단체를 규합, 사회주의 단체의 결속을 다짐하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1924년에는 무산계급 청년단체의 총규합을 목적으로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청년회연합회 산하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최창익(崔昌益)·이영 등이 국내의 청년단체를 규합, 조선청년총동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계통뿐 아니라 민족진영 계통의 단체, 신흥청년동맹들이 참여하여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민족적 결속이라는 의의를 갖고 출발하였으나 1925년 4월 창립시 중앙검사위원이었던 박헌영(朴憲永),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과 공산주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사회주의 청년단체와 공산주의 청년단체로 분립하게 되었다.

1925년 11월 신의주(新義州)의 공산청년단체인 신만청년회(新灣靑年會)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간부의 체포선풍이 불면서 사회주의 청년단체까지 탄압을 받게 됨에 따라 조선청년총동맹도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1930년대 사회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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