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공제회

[ 朝鮮勞動共濟會 ]

요약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
구분 노동단체
설립일 1920년 04월 11일
설립목적 조선노동사회의 지식 계발, 저축 장려, 위생 향상, 노동상황 조사
주요활동/업무 서울·부산 등에 노동강습소·노동야학 개설, 노동강연회 개최, 기관지 발간, 소비조합 상점 개설
소재지 서울
규모 회원수 1만 7259명(1921. 3)

1920년 4월 1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박중화(朴重華), 총간사 박이규(朴珥圭), 이사장에 차금봉(車今奉)·오상근(吳祥根)·신백우(申伯雨)·장덕수(張德秀)·김명식(金明植) 등이 선출되었다. 조선노동사회의 지식 계발, 저축의 장려, 품성의 향상, 위생 향상, 환난 구제 및 직업 소개, 일반노동상황 조사 등 6개 항을 으로 채택했다.

신문배달부·부·지게꾼·물지게꾼 등 와 정미공·인쇄공·연초공장 직공 등 공장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와 소작농민들까지 개인 자격으로 공제회에 가입하여 창립 당시 678명이던 회원이 1921년 3월에는 전국적으로 1만 7259명으로 증가했다. 1920년 5월 27일 대구대회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노사협조단체라느니 적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1920년 회장 박중화가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제2회 대회부터 회장제가 없어지고 집행위원제로 바뀌면서 계열의 인사가 많이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제3회 대회에서는 장덕수 등의 개량주의 계열은 크게 쇠퇴하고 윤덕병(尹德炳)·차금봉 등 사회주의 계열이 부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1922년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이 고조되면서 와 사회주의·사회개량주의 등으로 사상적 대립을 겪게 되어 사회주의 단체 안에서도 내부 갈등이 일어났다. 1922년 10월 15일 조선노동공제회의 윤덕병 계열이 각 지방노동단체를 독립시킨 후 재조직하여 좀더 계급적인 성격을 띤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했고, 장덕수 계열도 떨어져나감에 따라 조선노동공제회가 분리되었다.

활동내용을 보면 1920년 8월부터 서울·부산 등에 노동강습소·노동 등을 개설하고 노동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관지 《공제(共濟)》 《노동공제회보》를 발간하였다. 1921년 7월 15일부터는 서울 관수동에 한국 최초의 상점을 개설하여 일제 식민지경제 수탈에 항거하였다. 1922년 4월 소작인조합을 결성하자는 결의를 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농민을 지원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조직으로 결합되었다는 조직상의 약점,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와 노동자의 단결을 당면과제로 제기하지 못한 점은 있으나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24년 조선노동연맹회와 조선노동대회 등 모든 노동단체는 조선노농총동맹에 통폐합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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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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