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현

조병현

[ 趙秉鉉 ]

요약 조선 후기 문신.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와 권력투쟁을 하였다. 1830년 대사성이 되고, 다음해 세자시강원겸보덕, 공충도 ·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하여 신부 샤스탕,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부를 처형한 기해박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출생-사망 1791 ~ 1849
본관 풍양(豊壤)
경길(景吉)
성재(成齋) ·우당(羽堂)
활동분야 정치

본관 풍양(豊壤). 자 경길(景吉). 호 성재(成齋) ·우당(羽堂).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지평(持平) ·교리(校理)를 거쳐 1827년 암행어사로 나갔다. (趙秉龜)와 함께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김씨와 권력투쟁을 하였다. 1830년 이 되고, 다음해 겸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 공충도(公忠道) ·경상도 를 지냈다.

1838년(헌종 4) 예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판서로서 이조판서 (趙萬永)과 함께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하여 신부 샤스탕,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부를 처형한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켰다. 1841년 호조판서로 전임되어 《동문휘고(同文彙考)》의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하고, 이어 병조 ·예조 ·이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 1844년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으로 상시관(上試官)이 되어 과거(科擧)부정사건에 연루,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뒤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는데, 1847년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부정을 행한다는 안동김씨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거제도에 귀양간 뒤 풀려났으나, 1849년 재차 탄핵을 받아 전남 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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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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