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정현

[ 鄭玄 ]

요약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 시종 재야(在野)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출생-사망 127 ~ 200

자 강성(康成). 북해(北海:山東省) 고밀(高密) 출생. 시종 재야(在野)의 학자로 지냈고,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訓詁學) ·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처음에 향색부(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뤄양[洛陽]에 올라가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그 후 (馬融) 등에게 사사하여, 《역(易)》 《서(書)》 《춘추(春秋)》 등의 고전을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그가 뤄양을 떠날 때, 마융이 “나의 학문이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떠나는구나”하고 탄식하였을 만큼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귀향 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가르쳤으나, 44세 때에 환관들이 학자 등 반대당을 금고한 ‘당고(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4년 뒤에 금고가 풀리자 하진(何進) ·공융(孔融) ·동탁(董卓) ·원소(袁紹) 등의 초빙과, 만년에는 황제가 대사농(大司農)의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연구와 교육에 한평생을 바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고문 ·금문에 다 정통하였으며, 가장 옳다고 믿는 설을 취하여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경서의 주석을 하였고, 《의례》 《논어》 교과서의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또 하휴(何休)가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의 3부작을 펴내자, 그는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鍼膏肓)》《기폐질(起廢疾)》의 3부작을 지어 반박함으로써 하휴를 경복시켰다. 그의 저서 중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 《모시》의 전(箋)과 《주례》 《의례》 《예기》의 주해뿐이고, 그 밖의 것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잔여부분은 청나라 원균(袁鈞)의 《정씨일서(鄭氏佚書)》에 실렸다. 또 그의 《논어》 주석의 일부가 근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당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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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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