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도감

정치도감

[ 整治都監 ]

요약 고려시대의 폐정개혁기관.

체계적인 지침 위에서 고려사회의 모순과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고려에서는 나라를 바르게 하자는 ‘부정삼한(復正三韓)’의 주장 아래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으며, (元)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왕후(王煦)가 우정승에 취임하여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녹과전(祿科田)을 복구, 정비하였다. 그러나 반대세력 때문에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왕후는 1345년(충목왕 1)에 파직되었다.

1347년(충목왕 3) 원의 순제(順帝)로부터 폐정개혁에 대한 명령을 받아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정리도감장(整理都監狀)에 따라 개혁활동을 벌였다. 정치도감장에는 정치·경제·사회면에서 12개 조항의 당면문제를 거론하였다. 정치면에서는 지방관의 탐학과 정동행성관리의 작폐가 지적되었고 사회면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피역(避役)을 목적으로 정동행성·홀치(忽赤)·순군(巡軍) 등에 투속하는 현상을 문제삼았다. 가장 큰 관심이 표명된 경제면에서는 환관족속과 권세가가 불법으로 토지를 점령하여 농장을 설치하고 그것을 근거로 고리대를 자행하며 양민을 겁박하여 노비로 삼는 일에 대하여 응징, 시정할 것을 명시하였다.

정치도감의 정치관(整治官)들은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하였으며, 원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우정승 채하중(蔡河中)을 비롯해 의 동생 기주(奇柱) 등 유력자들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기황후의 친족 기삼만(奇三萬)이 옥사하자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는 정치관들을 구속하였고, 원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정치관들을 국문하고 장형에 처하였다. 정치도감의 본격적 활동은 3개월만에 와해되었으며, 1349년( 1)에는 정치도감이 폐지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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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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