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급

윤급

[ 尹汲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의 탕평책 하에서 노론이 완론과 준론으로 갈라지던 상황에서 국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준론 쪽에 섰다. 글씨에 뛰어나 독특한 서체를 세웠다.
출생-사망 1697 ~ 1770
본관 해평(海平)
경유(景孺)
근암(近庵), 문정(文貞)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근암집》 《근암연행일기》

본관 해평(海平). 경유(景孺). 근암(近庵). 시호 문정(文貞). 영의정 두수(斗壽)의 5대손이며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에게 배웠다. 1725년(영조 1) 진사시를 거쳐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답안에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아 격식에 위배되었으나 헌납 채응복(蔡膺福)의 상소로 구제되었다.

설서·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734년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이조(吏曹)의 낭관이 가지고 있던 인사추천권을 폐지한 것과 그것을 추진한 이조판서 송인명(宋寅明)의 인사추천권 독점을 비판하여 파직되었다. 1736년 사간이 되고 집의·검상·부응교를 거쳐 1737년 교리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삼사·승정원·육조 ·한성부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 ·이조 ·형조 판서와 좌참찬 등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746년에 동지 겸 사은사의 부사로 (淸)에 다녀왔다. 관직생활 중 업무상의 잘못이나 정우량(鄭羽良)의 권력행사에 반대한 것 등으로 일신현감이나 홍원현감으로 좌천된 적도 있고 유배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영조의 탕평책 하에서 노론이 완론(緩論)과 준론(峻論)으로 갈라지던 상황에서 국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준론 쪽에 섰다. 글씨에 뛰어나 독특한 서체를 세웠으며 저서로 《근암집》 《근암연행일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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