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공예

유리공예

[ 琉璃工藝 ]

요약 유리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공예품.
도쿄 디즈니랜드 유리공예

도쿄 디즈니랜드 유리공예

유리는 오늘날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널리 활용되어 왔고, 특히 공예 재료로 뛰어나다. 즉, 매우 단단하고 아름다운 광택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투명한 것도, 불투명한 것도 만들 수 있으며, 착색·성형도 비교적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점 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료의 가공에 고온(高溫)을 필요로 하고, 용해할 때 약간의 불순물이나 기포(氣泡)가 혼입되면 그 투명성을 잃게 된다. 또 제품은 온도의 급격한 변화나 충격에 약하고 깨지기 쉬운 결점도 있다. 인류는 이러한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수많은 아름다운 유리제품을 만들어왔다.

서양의 유리공예

유리의 기원에 대하여는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설이 유명하다. 즉, 페니키아의 상인이 시리아의 해안에 상륙하여 모래톱에서 취사하려고, 배에 싣고온 천연탄산소다 덩어리로 화덕을 만들어 불을 지폈더니, 소다와 모래톱의 모래가 녹아 유리가 만들어졌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니키아인이 활약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오리엔트, 특히 이집트에서 유리가 알려지고 있었다. 아마 도자기의 유약(釉藥)으로 쓰이던 것이 단독으로 발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의 유리는 유색 불투명하고, 색이 아름다운 보석의 일종, 혹은 그 대용품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장신구나 호부(護符) 또는 상감(象嵌) 재료로서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 유리기물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18왕조(BC 16∼BC 14세기) 무렵부터이다. 연꽃을 본뜬 다리가 달린 술잔, 밑이 뾰족한 향유병 등이 만들어졌으나 그 가운데서도 투트모세 3세의 문장(紋章)이 있는 술잔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 유리병의 제작법은 사심법(砂芯法)이었다. 금속 막대기 끝에 헝겊이나 진흙 모래를 뭉쳐서 달고, 그것을 용해된 유리에 적셨다가 꺼내서 표면을 다듬은 다음 냉각 ·응고시켜 속의 심을 빼내는 방법이다.

장식법은 청이나 보라의 암색(暗色) 유리로 본체를 만들어, 그 겉에 엿 상태로 녹인 밝은색(황색)의 유리끈을 감아 다시 가열하여 녹으려고 할 때 뾰족한 막대기를 상하로 긁어 색무늬나 색줄기를 만드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텔 엘 아마루나에서 출토된 물고기형의 병은 이런 종류의 유리기물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이집트의 유리공예는 왕조시대 이후에도 계속 성행하였다. 특히 헬레니즘시대부터 로마 지배기에 걸쳐서, 알렉산드리아가 시리아의 시돈과 더불어 유리제작이 세계 최대의 중심이 되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그리스인은 유리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하고, 이에 반해서 로마인은 유리공예를 크게 발전시켰다. 즉, 1세기경부터 취입유리(吹入琉璃) 제작법을 비롯한 가공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각종 기류(器類)가 양산됨으로써 로마의 영향 아래 있는 세계 각지에 퍼져나갔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을 로마 유리(Roman glass)라 한다.

취입유리 제작법은 시돈에서 발명된 것으로 보지만, 쇠파이프(취입막대기) 끝에 녹은 유리 덩어리를 묻혀 숨을 불어넣어 부풀게 하는 방법이 있고, 형(型) 속에 취입하면 똑같은 형의 그릇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또 공중에서 불면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부풀은 기물을 만들 수 있다. 이리하여 일상 사용하는 기물이 싸게 양산되었다.

한편 복잡한 기법을 쓴 정교한 기물도 만들어졌다. 즉 모자이크 유리, 보다 정교한 만화(萬華)유리, 상이한 색유리의 층을 파서 상(像)을 부조(浮彫)하는 카메오 유리 등이다. 로마 유리의 기법은 알프스를 넘어 유럽 각지에 전해지고, 영국이나 에스파냐에서도 유리기물을 제작하게 되었다. 보헤미아 ·바이에른 ·실레지아 등의 삼림지대나 영국에서 만들어진 술잔은 특히 유명하다.

한편 중세에는 건축 장식의 재료로서 유리가 큰 의의를 가졌다. 비잔틴 모자이크화에는 색유리와 도금유리의 작은 조각이 효과적으로 쓰여, 고딕식 교회당에는 색유리조각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로마 유리의 기술은 동방으로도 전해져, 각지에서 유리기물의 제작이 성행하였다. 특히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공인(工人)은 에나멜화(畵)의 인화, 금인화(金印畵)의 기술을 발달시켜 술잔이나 주발 ·쟁반 등의 유리기물에 응용하였다. 시리아의 알레포 및 다마스쿠스가 제작의 중심지였다. 중세 말에 베네치아에서는 일찍이 유리를 제조하고 있었으며, 13세기 말에 제작기법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부근의 작은 섬 무라노에 공장을 강제로 집결시켜 조직적으로 생산하였다.

16세기에 새로운 유리, 크리스털로(현재의 크리스털 유리와는 다르다)가 발명되어, 매우 얇고 투명한 기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환상적이고 기발한 장식을 가공하는 것이 유행하고, 특히 레이스 유리, 망(網)유리는 독특한 장식 효과를 나타냈다. 다이아몬드를 끝에 붙여 송곳으로 문양을 새기는 기법이나 에나멜화의 인화도 성행하였다. 베네치아의 기술은 마침내 다른 지방에도 전해져서 네덜란드 ·보헤미아 ·독일 ·에스파냐 ·영국 등에서 그 지방의 전통과 결합된 베네치아풍(風)의 유리기물이 만들어졌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5세기에 태공(太公) 르네 당쥬에 의해서 베네치아의 공인이 초빙되어 근세의 프랑스 유리공예의 기초를 만든 것은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말에는 금속판에 유리를 녹여 발라서 커다란 유리판을 만드는 방법이 발명되어 대형 거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675년경에 G.레이븐즈크로프트에 의해 완전히 투명하고 굴절률이 높은 크리스털 유리가 발명되어, 이후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 컷유리가 발달하였다. 근대의 유리공예는 19세기 말의 E.갈레나 L.C.티퍼니 등 아르 누보 작가들에 의해서 비롯된다. 그들은 종래의 장식법에 반발하여, 전적으로 공상적인 색채나 광택을 강조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R.랄리크가 금공(金工) 기술을 응용하여, 예술적인 유리제품을 프레스 가공에 의해서 성형하는 방법을 완성시켰다. 한편 미국에서는, 1903년에 스튜벤 공장이 창립되어 양질의 크리스털 유리에 의한 고급품의 생산이 활발하였다. 

동양의 유리공예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공예의 유물로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등지의 전국시대(戰國時代:BC 403∼BC 221) 후반기에 속하는 고분에서 발굴된 유리벽(壁)과 유리구슬 등을 들 수 있다. 벽은 원래 연옥(軟玉)으로 만들어진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의구(儀具)였으나, 전국시대 이후에는 요대(腰帶) 등의 장신구에도 사용되었으며, 당시로서는 색다른 유리제품이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던 듯하다. 다만, 이와 같은 유리제품들이 처음에는 오리엔트에서 중국인 취향에 맞도록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으며, 빛깔이 다른 유리알을 박아넣은 구슬 역시 서방의 기술이 전해짐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리(流離:琉璃)라는 명칭이 나타났으며, 이것은 벽유리의 약칭으로서 산스크리트의 ‘vaidurya’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나라 때의 고분에서는 사자(死者)의 입에 물리는 함(琀:매미 모양의 玉器)과 옥돈(玉豚:손에 쥐게 하는 돼지 모양의 玉器)의 대용품으로서 유리로 만든 기물이 발굴되었다.

같은 시대의 유물로서 한국 평양 근교에 있는 낙랑(樂浪) 고분(BC 2세기∼AD 3세기)에서도 유리로 만든 이당(耳璫:귀고리에 다는 구슬) 등 유리제품이 출토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는 로마 유리기물이 중국에 수출되기 시작하여 3세기 후반의 진대(晉代)에 이르러서는 그 수량이 상당히 늘어났다. 5세기의 북위(北魏)시대에는 중국에서 유리기물을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즉, 《후위서(後魏書)》 <서역전(西域傳)>에 보면 서역의 유리공장(工匠)이 도평성(都平城:山西省 大同)에 와서 5색의 유리기물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한편 허베이성[河北省] 징셴[景縣]에 후위 때인 483년에 죽은 봉씨(封氏)의 분묘가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출토된 청색과 청록색 유리기물들이 바로 《후위서》에 기록된 제품이 아닌가 추측한다.

한국에서는 5세기경, 곧 고신라시대의 고분인 경주 일대의 금관총(金冠塚:1921년 발굴) ·금령총(金鈴塚:24년 발굴) ·서봉총(瑞鳳塚:26년 발굴) ·은령총(銀鈴塚:46년 발굴) ·천마총(天馬塚:73년 발굴) 등 고분에서 관옥(管玉)과 곱은옥[曲玉] 및 특이하게 가지 모양의 구슬 등 여러 형태의 장식용 또는 장신구용 유리옥류와 함께 유리제품인 팔찌[釧] ·병 ·술잔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서봉총에서 한꺼번에 나온 유리제 배(杯) 3개와 팔찌 2개 등은 그 유례가 매우 드문 고분 출토 유물로 주목되었다. 그 중에서도 높이 9.6 cm의 술잔 모양의 그릇에는 그 하반부에 비스듬한 격자무늬가 불규칙하게 들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징셴의 봉씨 분묘에서 발견된 유리기물과 그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신라의 유물로는 경주시 황남동(皇南洞) 고분군 중의 하나인 98호의 남 ·북분에서 각각 출토된 유리제 병 ·술잔(국보 193 일괄지정)과 받침이 있는 술잔(보물 624), 그리고 천마총의 술잔(보물 620)이 있으며, 금관총에서는 무려 1만 8000여 개나 되는 유리옥이 쏟아져 나왔고, 천마총과 양산(梁山)의 부부총(夫婦塚) 등에서도 푸른 빛깔이 영롱한 유리 다면옥(多面玉)을 꿰어서 만든 화려한 경식(頸飾:목걸이)이 출토되었다.

한편,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도 유리로 만든 곱은옥 ·구슬옥(球玉) ·소옥(小玉)과 금색의 유리 식옥(飾玉) 등이 한꺼번에 수백 개나 출토되었다. 이렇듯 한국의 고대 왕릉이나 고분들에서 유리로 만든 찬란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곧 삼국시대에 이미 유리제품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선사시대(先史時代) 유적지에서도 유리옥의 발견 사례가 보고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로서, 이 땅의 선사인(先史人)들이 유리로 된 옥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옷에 꿰매기도 하며 귀고리의 장식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중국의 수 ·당(隋唐)시대에는 유리기물의 제조가 성행하고, 기술도 상당히 발전하였던 것 같으나, 이 시대의 유물이 희귀한 탓으로 확실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이 무렵으로 추정되는 백제 말기와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 불탑들에서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던 유리제 병과 잔 등이 발견된 것은 특이 한 예로서 주목된다. 중국의 유리제조는 당대(唐代) 이후 한때 쇠퇴하였다가, 명대(明代)에 유럽 기술을 도입하여 다시 성행하였다. 청대(淸代)에는 관영(官營) 공장도 세워져, 특히 건륭제(乾隆帝) 때에는 양과 질에 있어서 절정기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품은 아름다운 보석의 느낌을 주는 불투명한 유리이며, 부조나 투조(透彫)한 것이 많고, 이것을 일반적으로 ‘건륭유리’라 불렀다.

이 밖에 일본에서도 유리로 된 벽 ·구슬 ·팔찌 등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나, 이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건너간 것으로 본다. 1549년 포르투갈의 선교사 자비엘이 일본 상륙시에 유리거울과 망원경을 보냈는데, 이것이 근세 일본에 유럽의 유리가 전해진 최초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