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

[ Georgius Agricola ]

요약 독일 르네상스시대의 광산학자. 광산학의 기초를 닦았고 저서 《데 레 메탈리카》에서 탐광, 채광, 광석의 운반, 갱내의 환기와 배수 펌프의 장치, 야금 기술, 광부의 조직 ·급료 ·건강관리 등을 정확하게 관찰 기록하였다.
출생-사망 1494.3.24 ~ 1555.11.21
별칭 광산학의 아버지, 바우어(Bauer) 또는 포버(Power)
국적 독일
활동분야 광산학
출생지 독일 작센
주요저서 《데 레 메탈리카 De re metallica》(12권) 《신구광산론(新舊鑛山論)》(1546)

독일 작센 출생. ‘광산학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작센 지방의 글라우하우에 살았던 직물상의 아들로서, 처음에는 바우어(Bauer) 또는 포버(Power)라는 이름이었다. 1517년 라이프치히대학을 졸업하고, 츠비카우에서 라틴어 ·그리스어의 교사가 됨에 따라 이름도 라틴식으로 아그리콜라로 바꾸었다. 이어 이탈리아의 볼로냐 ·파도바 ·페라라 대학에서 의학 ·철학을 배웠고 인문주의자 D.에라스뮈스와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그는 2년 후 츠비카우에 돌아가서 의사의 직업을 가졌으나, 1527년 요아힘스타르의 시의(市醫)가 되었다. 이곳은 은을 캐는 광산도시로서 독일의 상업을 좌우하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광산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동기는 ‘금속을 의약으로 사용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신구광산론(新舊鑛山論) De veteribus et novis metallis》의 헌사(獻辭)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에 광산을 천시하던 학자들에 반대하였고, 광산에서 이루어지던 미신과 전설도 외면하고 ‘감성과 오성(悟性)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추구한다’는 과학적 태도를 지켰다. 1528년 《베르마누스 및 금속에 대하여 Bermanus sive de re metallica》를 썼으며, 1534년 다른 광산도시인 켐니츠의 의관(醫官) ·사료편찬관(史料編纂官)이 되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격동기로서 가톨릭교도였던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강한 요아힘스타르에서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546년부터 4회에 걸쳐 켐니츠 시장이 되었다.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지질학 ·광물학 ·금속학의 서적을 저술하였다. 1544년 《광물기원론 De ortu et causis subterraneorum》을 펴냈고, 1544년 《땅속 유출물과 그 성질에 대하여 De natura eorum quae effluunt ex terra》에서 지질학을, 1546년 《지하산물의 성질에 대하여 De natura fossilium》에서 광물학을, 그 해에 《신구광산론》에서 광산의 역사를, 1548년 《지중의 생물에 대하여 De animantibus subterraneis》에서는 땅속에 사는 동식물, 산의 신, 지하에 사는 사람에 관한 일까지도 기술하였다.

그의 이러한 지식을 집대성하여 펴낸 것이 유명한 《데 레 메탈리카 De re metallica》(12권)이다. 여기에서 탐광(探鑛), 채광, 광석의 운반, 갱내의 환기와 배수 펌프의 장치, 야금 기술, 거기에서 일하는 광부의 조직 ·급료 ·건강관리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관찰 기록하였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광산 전체가 마비되며, 거기에 과학과 기술을 크게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광산 전체를 하나의 생물로서 과학적으로 포착하여 광산학의 기초를 닦았다. 화가 B.베프링의 292매에 이르는 목판화는 당시의 선진적인 독일 광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세한 것이었다. 이러한 업적은 그 후 채광학 ·야금학 ·광물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참조항목

광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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