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

심약

[ 沈約 ]

요약 중국 남조시대의 문인. 시는 궁체시(宮體詩)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불교에 능통하고 음운(音韻)에도 밝아 시의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했다. 음운설(音韻說)은 영명체(永明體)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근체시(近體詩) 성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출생-사망 441 ~ 513
휴문(休文)
시호 은(隱)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캉[武康]
주요저서 《송서(宋書)》

자 휴문(休文). 시호 은(隱). 저장성[浙江省] 우캉[武康] 출생. 어려서부터 빈곤 속에서도 면학(勉學)에 힘써 시문(詩文)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처음에 송(宋)나라를 섬기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제(齊)나라를 섬겼는데, 소연(蕭衍)이 제나라의 제위(帝位)를 빼앗아 국호(國號)를 양(梁)으로 고쳤을 때, 이를 도운 공으로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다. 그 후 513년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현(貴顯)의 자리를 차지했다. 은(隱)이라는 시호를 받은 탓으로 심은후(沈隱侯)라고도 하며, 또 제나라 때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지냈다 하여 심동양(沈東陽)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는 정치가로서보다도 문인으로 뛰어나, 문학사(文學士)를 좋아했던 제나라의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그 아우인 경릉왕 자량(竟陵王子良)의 사랑을 받아 문단의 중견이 되었고, 양(梁)나라에 들어가서도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임방(任昉)의 문장, 심약의 시를 으뜸으로 꼽았는데, 그의 시는 세밀한 염정(艶情)을 노래하는 데 뛰어나 ‘궁체시(宮體詩)’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그는 또 불교에 능통하고 음운(音韻)에도 밝아, 비로소 사성(四聲)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시의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했다. 그의 음운설(音韻說)은 영명체(永明體)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근체시(近體詩) 성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성보(四聲譜)》 《진서(晉書)》 《송서(宋書)》 《제기(齊記)》 《송세문장지(宋世文章志)》 등 저술이 많았으나 《송서》만 전해지고 있다. 100권이나 되는 문집도 현재는 《한위육조 일백삼가집(漢魏六朝一百三家集)》에 실린 《심은후집(沈隱侯集)》(2권) 《한위육조명가집(漢魏六朝名家集)》에 수록된 《심휴문집(沈休文集)》(9권)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참조항목

무제, 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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