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슈타우펜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 Hohenstaufen dynasty ]

요약 중세 독일에서 1138∼1208년, 1215∼1254년까지 왕위를 차지하였던 왕조.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매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을 통치했던 잘리어 왕조(Salian dynasty)의 하인리히 5세가 아들없이 사망하자 여러 제후들이 황제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작센지방 벨프가문의 제후인 로타르가 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폰 뷔렌(?∼1094)은 잘리어 왕조 하인리히 5세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반환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두 제후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승리의 승산이 없자 결국 양측이 서로의 영지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1137년 로타르 3세(Lothar lll)가 사망하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동생 콘라트가 왕위를 어어 받아 콘라트 3세(Konrad lll)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프리드리히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시조(始祖)이나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슈바벤의 호엔슈타우펜을 본성(本城)으로 한 이후 슈타우펜가(家) 또는 호엔슈타우펜가(家)라고도 부른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6대 동안 계속되었다.

콘라트 3세는 1144년 동방으로 가는 십자군 원정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원정에 실패하고 유럽으로 돌아왔으며 1149년 오랜 경쟁상대였던 벨프가문과 왕권을 두고 내전에 돌입했다. 벨프가문에서는 여전히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왕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콘라트 3세는 내전에서 승리하여 왕권을 수호했지만 1152년 사망했다. 아들이 여덟살로 어렸기 때문에 슈바벤의 공작인 프리드리히 1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바바로사(Barbarosa 붉은수염)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가졌으며 그의 어머니는 정적인 벨프가문 출신이었기에 두집안의 오랜 분쟁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는 건실한 제국 운영으로 중앙집권적인 봉건국가를 실현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에 머무는 교황과 관계를 개선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황 하드리아누스와 관계가 악화되고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황제로 인정되기 어려워졌다. 1162년 밀라노를 공격하여 굴복시켰고, 1167년에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였지만 교황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군사적으로 협공을 받아 어려움에 처하였다. 독일로 돌아온 후 다시 이탈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밀라노를 공격하였지만 패전하여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고 독일은 여러 제후들의 영지로 분할되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재위 1190∼1197)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그는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다른 제후들과 경쟁에서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로마 교황에게서 황제의 왕관을 받았지만 이미 독일에서 그의 영향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가와 혼인관계로 시칠리아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로 호엔슈타우펜왕조 후기에 와서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경영을 둘러싸고 시종 교황권력과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시칠리아가 노르만인 탕크레드에게 정복되자 이를 되찾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오히려 패전하고 말았다. 이때문에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고 교황파 세력들의 반란이 거세졌다. 위기에 몰린 하인리히 6세는 재차 시칠리아를 공격하여 마침내 탈환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왕비가 포함되어 자신을 암살하려던 세력을 처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십자군원정에 가담하였다가 1197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하인리히 6세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겨우 3살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호엔슈타우펜왕조에서 왕위를 계승할 후보로 필리프가 추대되었고 정적이었던 벨프가문에서 오토 4세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오토 4세가 교황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오토 4세는 교황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고 교황은 다시 프리드리히 2세를 왕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에서 세력을 점차 강화하였고 오토 4세에 견줄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가 1250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그후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를 비롯하여 슈타우펜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독일 영방군주(領邦君主)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家)가 태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