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순자

[ Xunzi , 荀子 ]

요약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으며, 예(禮)를 강조하여 유학 사상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생-사망 BC 298? ~ BC 238?
본명 순황(荀況), 순경(荀卿)
별칭 손경자(孫卿子)
국적 중국 전국시대 조(趙)
활동분야 철학
주요저서 《순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이며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은 기원전 약 298년으로 추정한다. 성은 순(荀)이고 이름[名]은 황(况)이다. 그리고 자(字)는 경(卿)이다. 순경(荀卿)이 아니라 손경(孫卿)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순(荀)과 손(孫)의 옛소리[古音]가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으며, 예(禮)를 강조하는 유학 사상을 발달시켰다.

<사기(史記)>의 '순경열전(荀卿列傳)'에 따르면, 순자는 조(趙) 나라 출신으로 나이 50세 무렵에 제(齊) 나라에 유학(遊學)하여 최장로(最長老)의 학사(學士)로 세 차례나 제주(祭酒)를 지냈다고 기록한다. 후에 참소(讒訴)를 받아 제(齊)를 떠난 순자는 초(楚)의 재상(宰相)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 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난 순자는 난릉에 머물며 문인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스스로 공자를 추앙하는 유학자로 자처했고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전한(前漢) 말기에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정리되었고, 당(唐)의 양량(楊倞)은 여기에 주(註)를 붙이고 20권 32편으로 다시 정리했으며 명칭을 <손경자(孫卿子)>라 하였다. 오늘날 <손경신서(孫卿新書)>는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며, 양량(楊倞)의 주석본이 간략히 <순자(荀子)>라고 불리며 전해지고 있다. <순자> 32편은 '권학(勸學), 수신(修身), 불구(不苟), 영욕(榮辱), 비상(非相), 비십이자(非十二子), 중니(仲尼), 유효(儒效), 왕제(王制), 부국(富國), 왕패(王霸), 군도(君道), 신도(臣道), 치사(致士), 의병(議兵), 강국(彊國), 천론(天論), 정론(正論), 예론(禮論), 악론(樂論), 해폐(解蔽), 정명(正名), 성악(性惡), 군자(君子), 성상(成相), 부(賦), 대략(大略), 유좌(宥坐), 자도(子道), 법행(法行), 애공(哀公), 요문(堯問)'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철학사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羣)’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 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 초(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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