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저

성저

[ 城底 ]

요약 조선시대 서울의 도성(都城) 안과 도성에서 10리를 경계로 삼아 한성부(漢城府)에 포함시킨 서울의 행정구역.

조선왕조의 태조는 1396년(태조 5) 2월 수도 한양에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남산)·낙타산(駱駝山)을 연결하여 전체길이 5만 5000척(약 18 km)의 도성을 쌓게 하고, 바깥쪽에서부터 10리까지를 한성부의 관할로 삼았는데 이곳을 성저 10리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 성저 10리의 동쪽 경계는 양주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 서쪽 경계는 양화도(楊花渡)와 고양 덕수원(德水院), 남쪽 경계는 한강과 노량진이었고, 북쪽 경계는 특별히 정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백성들은 대체로 도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성밖 즉 성저의 경우에는 북동쪽으로 통하는 흥인문 밖의 도로변, 북서쪽으로 통하는 돈의문 밖의 도로변 등 제한된 범위 안에서 거주하였다.

성저 10리는 조선 후기 이래 지주제의 발달과 더불어 농민층의 분해가 심해지고 그에 따라 인근의 농민들이 농지를 떠나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른바 빈민촌을 형성한 지역이며, 이들에 의해 상업적 농업 등이 발달하고 상업의 발달에 따라 난전 등이 발달한 지역으로 변해 갔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이래 서울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의 지역적 공간도 확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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