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섭리

[ providence , 攝理 ]

요약 맹목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일정한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한 기독교적 세계관.

어원은 《창세기》 22장 8∼14절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약속의 기업으로 얻은 이사악을 모리아산 꼭대기까지의 사흘길을 가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야훼는 이사악 대신에 어린양을 준비해 두었다.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 바로 '섭리'라는 개념이다. 라틴어역에서 이 문구를 '데우스 프로비데트(Deus providet)'라 하여 섭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창조사(創造事)와 계약사의 중간 영역에 배려되어 있고, 이점에서 섭리론은 양자의 관련, 하느님과 인간의 자유가 개입할 수 없지만, 섭리에는 은혜 선택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결단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세계의 악이나 위기 문제를 섭리론에서 취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의 복음서 5:17)고 말하였다. 섭리란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활동(사역)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i》).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 하느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리고 무오(無誤)한 예지와 자유롭고 불변한 하느님 자신의 뜻에 따라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활동과 사물들을 유지 감독하고 처분 지배해서 그의 지혜와 권능, 정의와 선 및 은혜의 영화로움을 찬양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계몽기 이후의 근대 신학에서는 '이신론'의 형태를 취했고, 여기서 자연신학이 섭리신앙의 대용품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 신학에서는 인간 중심의 섭리론으로 기울어져 인간의 혼란을 가져왔다.

20세기부터는 다시 성서의 섭리신앙을 새로운 형태에서 해석,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참조항목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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